[정병욱의 음악이야기] 예술은 윤리로부터 자유로울까

2018-03-07 06:00

[사진=정병욱 대중음악평론가·한국대중음악상선정위원]


‘2018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지난 2일, 이틀 전 시상식에서 3관왕을 차지한 주인공 강태구가 지속적으로 데이트 폭력을 가해 왔다는 그의 전 연인이자 음악적 동료 ‘아를’의 폭로글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상에 올라왔다. 아직까지 강태구의 공식 사과나 해명, 추가 진위 확인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연인관계의 데이트 폭력이나 가스라이팅이 항간의 미투운동 속 성폭행 및 성추행과 다르다고 여겨지는 것인지 큰 화제가 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향후 추이에 상관없이 진정성 있는 음악을 표방해온 포크 뮤지션에 대한 폭력 행위 고발 앞에 벌써부터 실망이나 분노의 반응이 나오고 있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선정위원 중 한 사람으로서 만약 본 이슈가 선정과정 이전에 발생했다면 선정결과가 달라졌을지 생각해보게 된다. 15년째 지속되고 있는 한국대중음악상은 가수보다 음반과 노래 자체에 주목하고 판매나 미디어 기여도가 아닌 음악적 성취를 기준 삼아 상을 수여해 오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이를 문제시하지 않는 것이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이미 2016년 제13회 시상식에서 한국대중음악상은 당시 대마 흡연으로 구치소에 복역 중인 이센스에게 옥중 수상을 안긴 적도 있다.

그렇지만 죄의 경중을 떠나 명백한 위법임에도 포괄적인 사회적 배신 수준으로 대중에게 받아들여지는 약물 범죄와 다르게, 성범죄를 포함한 폭력 문제는 명징한 피해자가 있고 피해자가 나와 내 주변 사람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보다 강력한 공감대를 형성한다. 문학계 고은 시인에 대한 미투(Me Too) 고발 및 성추행 의혹이 터져나오자 서울시가 시인의 서재를 재현한 ‘만인의 방’ 철거 결정을 내리고, 그의 작품에 대한 교과서 삭제 방안이 본격적으로 나오는 것 또한, 향방이야 어찌 됐든 현 시점 고은 시인 작품에 대한 수용자들의 시선이나 평가가 사건 이전 같지 않음을 시사한다.

“작가의 도덕과 작품은 별개”라는 옹호나 “그 당시는 많은 이들이 그랬다”는 시대성을 핑계 삼아 오히려 문화예술계의 황폐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창작자의 윤리에 대한 검열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지적도 있다. “예술에 윤리라는 잣대를 들이댈 거면 넌 진보하지 말고 내 음악도 듣지 말고 닥치고 가서 집 정리나 해." 래퍼 스윙스의 ‘불도저’(2013) 속 가사는 윤리를 잣대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지 말라는 힘준 목소리가 담겨 있다.

문제는 오늘날 그것이 음악이든지 무엇이든지 작품의 향유가 전근대처럼 소수만의 특권이 아니며, 특히나 그것을 소비하는 대중이 창작자의 비윤리적인 부정, 곧 삶과 작품에서 오는 괴리를 알아채는 눈과 이를 좌시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생겼다는 점이다. 이는 예술작품이 그 자체로서 도덕성을 지니는지에 대한,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이어진 해묵은 미학 논쟁이나 예술가의 창의가 창작 결과물과 상관관계가 있는지 여부와는 상관이 없다. 하나의 예술작품 안에 작가와 수용자, 사회 모두가 투영된다는 전제 아래, 작품이 아무리 고상한 진리와 아름다운 가치를 담고 있어도 작가의 부도덕이 몰입이나 비평을 방해한다면 그것이 수용자와 사회로부터 유리된 반쪽짜리 작품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세기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나치 전범이었다. 단순한 나치 당원이었던 것이 아니라 괴벨스 휘하의 비밀경찰요원으로 활동하며 다른 음악가들을 감시하는 적극적인 나치 조력자였다. 그럼에도 카라얀의 악곡 해석은 여러 레퍼토리에 걸쳐 당대 최고로 추앙받으며 그로 하여금 절대적인 부와 명성을 거머쥐게 하였다. 대신 당시에도 극과 극으로 평가를 갈리게 했던 카라얀의 반인륜적이고 비도덕적인 경력은 그의 사후에 옹호의 목소리를 점차 줄어들게 하고 있다.

작품이 만들어지고 완성되는 순간 발현되는 예술가의 재능, 곧 예술성이나 작품 자체는 작가 자신의 윤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허나 그것이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작품이 ‘윤리’나 ‘도덕’이라는 말을 대체할 수 있는 작가의 ‘역사의식’과 ‘시대성’을 결부해 평가받는 것 또한 예술의 숙명이다. 게다가 그것이 당대의 시대성에 의해 옹호되어야 한다면, 반대로 현재의 시대성에 의한 재고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재즈 거장 류복성, 드러머 남궁연, 래퍼 던 말릭 외에 아직까지 문학·공연·영화계의 그것만큼 확산되고 있지 않은 음악계의 미투 운동이 더 번져나가, 감춰진 진실이 있다면 들추고 마땅히 필요한 구조적 변혁을 일으키길 바란다. 그것이 진정 좋은 음악 및 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위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