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08] 반란인가? 구국항전인가? ①
2017-12-09 10:15
하지만 그 와중에서 무신정권이 몰락하고 몽골의 사정도 변해가면서 점차 지긋지긋한 전쟁을 마무리 짓는 쪽으로 분위기가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한 분위기의 고비가 되는 것이 대칸 뭉케의 죽음이었다. 뭉케의 죽음은 쿠빌라이와 고려의 태자 왕전의 만남을 가져왔고 그 것이 고려와 몽골의 관계를 새롭게 전환시키는 계기가 됐다. 팔만대장경의 제작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았던 부처의 힘이 그러한 안배를 해 놓은 것이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 34년 만에 개경으로 환도
원종이 자리를 비운 동안 임연(林衍)이 죽고 그의 아들 임유무(林惟茂)가 권력을 이어 받았다. 그 역시 아버지 임연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 받아 몽골군과 맞서 싸울 것을 선동했으나 전쟁에 지친 조정과 백성 대부분은 동조하지 않았다.
‘삼별초(三別抄)의 난(亂)’이라고도 하고 ‘삼별초의 항몽(抗蒙)’이라고도 하는 것도 보는 관점에 따라 차이가 생긴 해석인 것 같다. 필자가 역사학도도 아니고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다각도로 깊게 분석해
결론을 이끌어낼 만한 기량도 부족한 탓에 학자적인 접근은 어렵다. 하지만 삼별초의 행동을 보통 사람의 눈으로 읽어본다면 두 가지 해석이 모두 옳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것을 가르는 것은 삼별초가 항전에 나선 동기와 항전에 나선 이후의 행동이 아닐까?
▶ 개경환도 반대한 삼별초
일단 여몽전쟁을 사실상 3년이나 연장해간 삼별초의 저항 과정을 보자. 고려왕조가 섬에서 나와 개경으로 환도했지만 이에 동조하지 않고 반기를 든 세력이 바로 삼별초다. 그래서 이들의 항쟁으로 몽골과의 전투는 아직 한고비를 남겨 놓고 있었다. 이들의 항쟁을 나라 對 나라 사이의 전쟁으로 보는 데는 무리가 있지만 고려인과 몽골군 간에 전투가 이어졌다는 점에서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기도 어려운 측면이 있다.
▶ 무신정권 전위대로 특권과 횡포
삼별초는 원래 최씨 무신정권 시절에 최우가 조직한 선택받은 군대였다. 밤에 개경 경비를 위해 조직된 야별초(夜別抄)가 그 시작이었다. 이 야별초의 수가 많아지면서 좌별초와 우별초로 쪼개지고 여기에 몽골에서 돌아온 포로들로 이루어진 신의군(神義軍)이 보태지면서 삼별초라 불렀다. 이들은 원래 사병들이 아니었으나 무신정권이 이들에게 특권을 주며 사병으로 이용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무신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했다. 정권의 비호를 받았던 이들은 특권의식에 젖어 횡포를 부리는 일이 잦았다. 갖가지 불법 행위를 저지르는 경우도 많았다.
"정권을 잡은 무신들은 삼별초를 자신의 앞잡이로 만들기 위해 녹봉을 후하게 주고 사사로이 혜택을 베풀었다. 또 죄인의 재산을 몰수해 나눠주기도 했다. 김준이 최의를, 임연이 김준을, 송송례가 임유무를 제거하는 데는 모두 삼별초의 힘을 빌렸다."
고려사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당시 삼별초가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었는지를 짐작할만하다.
▶ 특권상실에다 처벌 우려로 반란
삼별초의 반란은 이런 배경 아래서 일어났다. 배중손(裵仲孫), 김통정(金通精)등 삼별초 지휘관들은 개경 환도를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켜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을 왕으로 옹립했다. 이들은 고려조정의 親 몽골적인 정책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던 일반 백성들의 정서를 부추겨 反 몽골세력을 규합했다.
▶ 화친 반대세력 대거 합류, 진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