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신문학 100년] 케임브리지로 간 낭만주의 시인…쉬즈모
2017-11-16 16:40
美서 금융학 공부 중 영국 문학가 러셀에 심취…케임브리지大 유학
한 때 부르주아 문학가로 평가받다…개혁·개방 후 작품 등 새롭게 조명
한 때 부르주아 문학가로 평가받다…개혁·개방 후 작품 등 새롭게 조명
“살며시 나는 떠나네/마치 내가 살며시 왔듯이/살며시 손을 흔들며/서쪽 하늘구름과 작별하네”
(輕輕的我走了, 正如我輕輕的來, 我輕輕的招手, 作別西天的雲彩)
중국 근현대 문학사에서 최고의 낭만주의 시인으로 평가 받는 쉬즈모(徐志摩)의 대표작 ‘다시 케임브리지를 떠나며(再別康橋)’의 첫 구절이다.
장동천 고려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는 지난 8일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학교 청산MK문화관에서 ‘낭만이 시작되는 곳, 케임브리지’라는 주제로 강의를 진행했다. 장 교수는 쉬즈모의 대표작 ‘다시 케임브리지를 떠나며’를 읊으며 그의 영화같은 삶을 소개했다.
장 교수는 “중국인들이 왜 유독 영국의 케임브리지에 열광하는가에 대해 연구를 하면서 한국 사람들에겐 생소한 중국의 현대시와 쉬즈모라는 인물을 쉽게 알리기 위해 이번 강좌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이번 강의는 ‘중국 신문학 100년, 작가를 말하다’ 시리즈의 두 번째 강좌다. 진융(金庸), 루쉰(魯迅) 등 중국 근현대 최고의 작가를 소개하는 데 초점을 맞춘 이번 시리즈 강좌는 고려대 BK21플러스 중·일 언어·문화 교육·연구 사업단에서 주최하고, 고려대 중국학연구소, 중국어문연구회에서 주관했다.
장 교수는 '다시 케임브리지를 떠나며'는 쉬가 세 번째로 영국 케임브리지를 방문하고 떠날 때 지은 그의 대표작이라고 소개했다. 1928년에 창작된 이 시는 당시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유학하던 쉬의 독특하면서도 섬세한 시적 감성이 잘 표현돼 있다.
중국 저장(浙江)성 하이닝(海寧)의 대부호 집안에서 태어난 쉬는 사랑과 자유에 대한 추구와 그것을 얻지 못한 고뇌와 실망을 시의 주제로 삼아 절실하게 표현해 낸 중국 최고의 낭만 시인으로 평가된다. 그의 낭만적이고도 서정적인 작품은 중국 현대문학의 한 시대를 풍미했다. 장 교수가 쉬즈모를 '중국의 김소월'이라고 묘사한 이유다.
1931년 쉬는 불의의 항공사고로 3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사망은 한국에도 소개가 됐는데 동아일보의 정래동 기자가 장문의 추도문을 신문에 게재해 화재가 됐었다.
장 교수는 “그는 한때 중국인들이 처한 현실을 부정한 채 이상만을 고집한 부르주아 문학가로 각인돼 합당한 평가나 대접을 받지 못했다”며 “1980년대 이후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과 더불어 시대가 변하면서 쉬즈모라는 인물과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도 새롭게 이뤄졌다”고 부연했다.
1918년에 베이징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쉬는 클라크대학에서 금융학을 공부하면서 '중국의 해밀턴'을 꿈꿨다. 유학 생활 중 그는 영국의 문학가 버트런드 러셀의 작품에 심취해 컬럼비아대 박사 과정을 포기하고 영국으로 떠났다.
장 교수는 “그 당시에는 버트런드 러셀과 골즈워디 디킨스 등 영국 최고의 문학가들이 중국에 대한 관심을 보이는 시기였다”며 “특히 디킨스는 동양철학의 가치를 존중하고 서구의 식민지배를 비판한 인물로 쉬의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1920년부터 1922년까지 약 2년간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유학한 그는 영국식 낭만주의와 전원주의 문학의 영향을 받아 처음으로 자작시를 만들었고 더불어 그의 삶도 전환점을 맞게 됐다.
장 교수는 ‘다시 케임브리지를 떠나며’는 “중국인의 안목으로 케임브리지를 끌어와 공동체의 문화기억으로 장착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케임브리지로의 귀환은 빛나는 청춘과 문학생명의 원천을 상징하고 중국인들로 하여금 케임브리지에 대한 특별한 ‘장소의식’을 생성했다”고 묘사했다.
또한 “중국인들 입장에서는 쉬의 작품을 통해 서구를 향한 ‘문화영토화’ 욕망을 충족시키기도 하면서 불행한 당시 근대사를 상쇄하는 등 다양한 감성을 자극시키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장 교수는 쉬가 중국 현대문학에서 차지하는 역할과 위치에 대해 “당시 시대적 상황을 보면 많은 유명 지식인들이 봉건적인 문화와 제도에 반대하는 계몽 운동인 ‘신문화 운동’에 적극 가담했던 시기였다”며 “쉬 같은 경우는 신문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진 않았지만 당시 지식인들의 메시지에는 동의했던 사람이고, 주류와 일정 거리를 두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당시 아편전쟁으로 중국을 유린한 영국을 찬양한 쉬가 중국인으로부터 비난을 받지 않았나라는 질문에 장 교수는 “물론 영국에 대한 인식이 좋진 않았지만, 영국은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받았던 배상금을 돌려주는 등 유화 정책을 많이 펼쳤다”며 “중국인들의 영국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 개선됐던 시기라 영국을 좋게 묘사했다고 해서 큰 비난을 받지는 않았다”라고 설명했다.
장 교수는 쉬가 화려한 여성편력으로도 유명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쉬를 이야기 할 때는 항상 세 명의 여인이 거론된다"며 "그의 첫째 부인 장유이(張幼儀)와 그가 평생 짝사랑한 린후이인(林徽因) 그리고 둘째 부인 루샤오만(陸小曼)이 대표적”이라고 말했다. 특히 장유이는 쉬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가장 먼저 사고현장으로 달려가 그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식까지 치르는 등 이혼 후에도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보여준 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