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종린칼럼] 길은 길로 평가 받아야
2017-09-14 20:00
모종린칼럼
길은 길로 평가 받아야
한 지역이 있다. 역 중심으로 6개 동네가 밀집돼 있다. 중앙역 서쪽 3개 지역은 상가와 수공업이 일부 들어선 낙후된 주택지다. 동쪽 3개 지역은 고층 빌딩이 들어선 상업 지역이다. 10차선 도로와 철길이 갈라놓은 여섯 개 지역을 걸어서 이동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보행객이 없는 도시 거리는 사막과 진배없이 삭막하다. 동부와 서부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는 고가도로다. 오래전부터 안전성 문제가 제기된 철거 대상이다.
도시재생 수업 시간에 논의하기 좋을 사례다. 교수는 학생들에게 이 지역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고 질문할 것이다. 과연 학생들은 어떤 대안을 제시할까? 학생들은 고민할 것이다. 뛰어난 건축가나 도시재생 전문가도 빌딩 숲에 묻혀 있는 철도 지역을 활기찬 도시 공간으로 만드는 아이디어를 내놓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교수는 학생들이 제시한 대안을 토론한 후 정부가 실제로 선택한 대안을 공개할 것이다. 자신이 제시한 대안과 실제 선택을 비교하는 것이 사례 연구 수업의 매력이다. 학생 입장에서는 '정답' 없는 문제는 답답하다.
교수가 공개한 정답은 고가 공원 조성이다. 시장선거에 나온 정치인이 선거 공약으로 고가도로를 보존하고 보행로와 공원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내세웠고 당선 후 이를 실행에 옮겼다고 부연할 것이다.
서울 시민이라면 이미 이 사례가 박원순 시장의 '서울로 7017' 프로젝트임을 간파했을 것이다. 실제 상황의 평가자는 시민들이다. 시민 평가는 현재 진행형이다. 박 시장이 고가 공원을 제안한 그날부터 시작된 논쟁은 2017년 5월 개통된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서울로 7017에 대한 수많은 평가 중 필자 가슴에 가장 와 닿은 서울시 공무원의 한마디다. "서울로 7017은 공원보다는 길이라는 것에 중점을 두고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서울로는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 정책의 첫걸음입니다. 자동차가 다니던 길이 사람이 다니는 길이 되었고, 주변 역시 걷기 좋은 길로 만들 계획입니다."
그렇다. 공원에 대한 논란에 빠져 우리는 서울로가 길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서울로가 좋은 길이고 필요한 길이면, 그 자체만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공원으로의 성공 여부는 그 다음 문제다.
서울역은 서울의 중앙역이다. 중앙역이기에 외부 접근성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중심 철도인 경부선의 종착역이자 공항철도역과 지하철역, 그리고 버스 환승장이 위치한 교통의 요지다.
서울역 주변이 통합된 지역으로 발전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내부 연결성이었다. 내부 도로의 부재로 서울역 6개 지역은 서로에게 섬 같은 존재였다. 서울로 7017의 개통으로 서울역 6개 지역은 도보로 연결됐다. 특히, 서울역에서 명동으로 연결되는 중심도로는 공항철도를 이용해 시내로 진입하는 외국 여행객에게 쾌적한 보행로를 제공한다.
추가적인 보행로 사업으로 서울역 인근이 걷기 좋은 지역으로 탈바꿈한 미래를 상상하자. 만리동, 청파동, 중림동 등 서부 지역에 새로 열리는 관광 자원은 서울역 지역을 광화문에 버금가는 서울 대표 관광명소로 만들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지역 활성화 효과가 관건이다. "사람의 길이 열리면 경제가 살아납니다." 유동인구가 늘어나면 도로변 상가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이미 만리동 입구 지역에는 변화가 감지된다. 서울로가 개통되면서 오래된 건물을 활용한 특색 있는 카페와 커피 전문점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서울역 골목길 경제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골목길 경제학의 처방은 첫째, 서부지역을 예술가들이 모이는 지역으로 만드는 것이다. 새로운 문화시설을 유치하기 어렵다면 기존 문화시설을 국립극단 주변으로 이전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
둘째, 기존 상권과의 연결성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고가 공원 동부의 남대문시장과 명동을 서부의 가장 가까운 상권인 숙대입구와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것이다. 기존 상권과 서울로 사이의 거리를 걷고 싶고 볼거리 많은 보행로로 만드는 것이 고가 공원 사업의 성패를 결정할 것이다.
셋째, 서부지역에 대규모 건설 사업을 추진하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 골목길 인프라를 보전하는 방향으로 서부지역을 재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건축가 황두진의 지적대로 서울은 5층 규모의 주상복합 건물로 도시 보편성에 맞는 밀도를 유지해야 한다.
서울로를 시작으로 서울역 주변에 수많은 ‘사람 길’이 열리고 서울역이 선진국 도시의 중앙역과 같이 문화와 비즈니스의 중심지로 기능하기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