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포커스]정몽헌 회장과 남북경제협력사업

2017-07-30 18:03

채명석 산업부 차장[.]

“생김새와 언어가 같은 우리 동포가 함께 어우러져 서로를 이해하고, 땀 흘려가며 만든 경쟁력 있는 상품을 외국에 수출해 외화를 벌어들인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미래에 큰 희망이며 후손에게 길이 남겨줄 큰 자산이라고 확신합니다.”

2000년 6월 30일,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은 개성공업지구(이하 개성공단) 사업의 의의에 대해 이같이 강조했다. 이 말은 현대그룹을 넘어 우리 기업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남북경제협력사업의 목표이자 지향점이다.

남북경협사업은 부친인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만큼 정몽헌 회장에게도 숙명이었다. 단순히 부친의 유업을 물려받는 데 그치지 않고, ‘통일’을 위해 현대그룹과 자신이 어떻게 기여해야 할지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현대그룹의 남북경협사업이 아산의 개인적 의지의 결실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좁은 식견이다. 현대그룹은 회사 역사에 버금갈 만큼 오랜 시간을 거쳐 치밀하게 준비했다. 미국과 서유럽 등 선진국은 물론 중동, 아프리카, 동남아·서남아 등에 이어 러시아와 동구권, 중국 등 공산주의국가 진출을 모두 성공시킨 뒤 마지막으로 북한을 두드렸다. 북한의 교역국을 움직여 그들이 먼저 접촉하게 만들기 위한 전략이었다.

사업은 감성만으로, 또는 이성만으로 성공할 수 없다. 더군다나 남북경협사업은 정치적 이념의 대립과 군사적 충돌 위협까지 맞물린 위험천만한 사업이다. 실향민 출신인 부친은 북한을 이성적으로 대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정몽헌 회장이 중심을 잡아줬다.

북한 측에 대의명분을 만들어 줌으로써 협상 테이블에 끌어들인 것도, 금강산관광사업과 개성공단 사업을 추진할 수 있게 한 것도 정몽헌 회장의 사업가적 능력 덕분이었다는 후문이다. 현대그룹 출신 최고경영자들은 정몽헌 회장에 대해 “같은 민족, 같은 국가라는 원칙에 따뜻한 가슴으로 다가가되, 경제협력을 통한 양측 간 공동번영이라는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냉철한 지혜로 남북경협사업을 추진했다”고 평가한다.

정몽헌 회장은 남북경협사업은 무한 경쟁을 하고 있는 세계에서 우리 민족의 공동 발전과 번영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믿었다. 경제적 측면에서 비롯된 파급효과가 우리 민족의 동질성 회복은 물론 남북간 상호 이해의 폭을 넓혀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통일시대를 대비한 경영인들의 자세를 강조했다. 1997년 현대건설 신년사를 통해 “국가경제발전의 주역으로서 다가올 통일시대와 국경 없는 세계화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시대를 앞서가는 거시적인 안목과 새로운 기업가 정신 그리고 확고한 사명감과 신념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올해는 정몽헌 회장의 14주기(2003년 8월 4일 별세)이자 그가 태어난 지 69주년(1948년 9월 14일 탄생)을 맞는 해다. 현대그룹은 정몽헌 회장 14주기 추모식을 금강산에서 개최할 수 있도록 북한측에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우려되는 점은 아무리 남북간 대치상황이 심각했어도 금강산 추모식을 허용해왔던 북측이 이를 거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것이다. 믿었던 현대그룹조차 지난 19일 통일부에 ‘북한 주민 접촉 신청’을 제출해 승인받아야 했고 어렵게 접촉한 결과가 거부였으니 순수 민간기업 차원도 남북간 대화도 완전히 중단됐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이다.

남북관계가 어려울 때마다 창조적 식견과 진취적 기상으로 활로를 뚫었던 정몽헌 회장이 지금 살아있다면 과연 어떤 해법을 제시했을까.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지혜와 이해 관계자들의 입장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협상력과, 큰 그림을 끌고 나갈 수 추진력을 갖춘 인사가 어느 때보다 아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