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의 아침묵상] 5. 관찰觀察
2017-07-02 20:00
눈감기
오늘도 어김없이 ‘하루’라는 소중한 시간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오늘이라는 이 순간을 의미가 있고 아름답게 만들 것이다. 신은 나에게 숨겨진 최선을 일깨우고, 어제와 다른 나를 만들도록 절호의 기회를 선물한 것이다. 나는 수련 공간인 ‘방석’위에 좌정(坐定)한다. 내가 그 곳에 좌정한 후, 하는 일이란, 눈을 감는 행위다. 잠에서 깬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다시 눈을 감는다. 어젯밤, 몸이 피곤하여 새 힘을 얻기 위해 눈이 저절로 감겼다면, 오늘 이른 아침엔, 자신을 직시하고,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헤아리기 위해 일부러 눈을 감는다. 눈을 감는 행위는 이전의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로 부활하겠다는 의지다.
보는 행위는 동물의 가장 중요한 생존 기술이다. 인류의 조상들이 네 발로 걷다 두 발로 걷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두 가지 기능을 강화하였다. 하나는 사냥할 대상을 관찰하여, 그 취약점을 가려내는 행위다. 특히 동물의 움직임과 발자국을 파악하고 추적하였다. 모든 동물들 중 인간만이 눈이 얼굴 앞에 달려 있다.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에 몰입했기 때문에 진화적으로 그렇게 고정되었다. 인류가 동물을 관찰하고 몰입할 때, 그는 다른 동물의 공격에 취약하다. 그러기에 자신을 옆에서 지켜주는 친구가 필요했다. 우정은 인류의 또 다른 생존기술이다.
눈을 감는 행위는 위험하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방식을 포기하는 행위다. 그러나 두 눈을 감는 행위는 어제까지 살던 과거의 자신과 그 세계관을 버리는 용기다. 인간은 이른 아침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 우주가 탄생하기 전, 혼돈과 암흑의 세계로 자신을 의도적으로 몰아넣는다. 눈을 감는 행위는 자신을 매일 아침 새로운 인간으로 부활시키기 위한 통과의례다. 기도란 어제의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를 구축하겠다는 결심이다.
2. “내 자신을 위한 노래”
수련하지 않는 나, 어제의 나는 내가 아닌 다른 것이 집착한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는 사람은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을 스스로 정의하지 못한다. 자신이 없고 항상 다른 사람의 말을 빌려 자기를 꾸미려 한다. 더 이상 두 발로 디디고 굳건하게 일어서서 목적지를 향해 과감하게 발을 디디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못하고, 성인이나 철학자의 말을 인용하는데 익숙하다.
미국이란 나라를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 150년 전 독창적인 시를 쓴 한 시인이 있다. 월트 휘트먼(1819-1892)이다. 가난해서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지만, 그의 생각은 독창적이다. 그는 글을 통해 미국의 정신을 정의하고 미국의 이상을 제시하였다. 그가 쓴 '내 자신을 위한 노래'는 미국정신을 넘어 세계정신을 담은 숭고한 서사시다. 이 시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내 자신에게 예배드리고 내 자신을 노래합니다. 내가 취한 것을 당신도 취할 것입니다. 왜냐 하면, 내게 속한 원자(原子)가 당신에게도 속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빈둥빈둥거리며, 내 영혼을 불러냅니다. 나는 땅에 몸을 기대어 편안하게 빈둥거리다 여름 풀잎 하나를 관찰합니다.”
휘트먼은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나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처럼, 뮤즈 신에게 영감을 달라고 구걸하지 않는다. 그는 고대 이스라엘의 다윗이나 로마의 오거스틴처럼 신을 찬양하고 노래하지도 않는다. 자신을 들려다보고 자신을 위대하게 확장하여, 위대한 자신을 노래할 뿐이다. 자신이 거룩한 시간에 들어가는 장소는 ‘자기 자신’이라는 신전이기 때문이다. 그는 비겁하지도 않고 변명하지도 않는다. 그는 두 발로 땅을 디디고 있지만 숨을 가다듬고 눈을 저 멀리 하늘에 떠 있는 북극성보다 더 빛나는 자기 자신을 직시하고 있다. 그는 타인이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으면, “나는 나다”라고 대답한다. 오래 전 고대 이스라엘의 민족영웅 모세는 신에게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신은 대답한다. “나는 나다.” 신적인 사람은 다른 성인이나 현자를 인용하지 않는다. 자신을 통해 자신을 설명할 뿐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국가'에서 ‘동굴의 비유’에서 우리가 극복해야 할 지식 두 가지를 말한다. 자신이 아닌 불완전하고 왜곡된 타인에 의존하는 지식들이다. 인간은 동굴 안 깊숙이 동굴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동굴 안 벽을 보고 있는 포로와 같다. 동굴 벽과 동굴 입구 중간쯤에 어떤 사람이 불을 피워놓고, 그 앞에서 물건을 들어올린다. 그러면 그 물건의 그림자가 불빛을 통해, 동굴 벽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포로들은 일생 동안 흩날리는 불빛에 매순간 반응하는 그림자를 실재라고 착각한다. 플라톤은 이런 그림자를 그리스어로 ‘에이카시아’(eikasia)라고 불렀다. ‘에이카시아’는 인간이 극복해야 할 첫 번째 ‘지식’이다. 누군가 생산해 내, 우리에게 전달한 이차적인 앎이다. 그 지식은 내가 스스로 확인해 본적이 없기 때문에, 일종의 짐작이다.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다른 사람들의 강의나 요약본으로 지식을 축적한다.
어떤 인간이 남들이 전달하는 정보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만의 세계관을 갖기 위해, 과감히 자신의 머리와 손발을 고정시킨 밧줄을 풀고 그림자가 아니라 그림자를 발생시킨 ‘불’과 ‘사물’ 쪽으로 몸을 틀어 걸어간다. 그는 누군가 자신의 세계관을 조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자기 스스로 그림자가 아닌 사물을 보기 시작한다. 플라톤은 이런 앎의 단계를 그리스어로 ‘피스티스’(pistis)라고 불렀다. 피스티스는 흔히 ‘믿음’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플라톤은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한 두 번째 지식인 ‘믿음’도 버려야 한다고 충고한다. 우리는 어떤 대상을 두 눈으로 확인하여 그것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 믿음은 동시에 ‘자신’이라는 편견을 통해 본 편협한 세상을 ‘진리’라고 착각하는 마음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대영박물관에서 로제타스톤을 보았다고 가정하자. 그가 로제타스톤 밑에 달린 몇 줄 설명을 읽었다고 그 내용과 역사적인 맥락 모두를 아는 것은 아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과 발굴이야기, 샹폴레옹의 판독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이집트어를 전공한 학자는 로제타스톤에 새겨진 성각문자와 민중문자를 읽고 그 내용을 자세히 말할 수 있으며, 그리스 학자는 고전 그리스어로 기록된 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 내가 로제타스톤을 두 눈으로 분명히 보았다고 할지라도, 사실 내가 아는 것은 거의 없다. 로제타스톤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학자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그가 자신의 해석이 유일하다고 착각하는 마음 또한 ‘피스티스’다. 이런 의미에서 피스티스는 ‘불완전한 지식’ 혹은 ‘허황된 앎에 대한 신봉’ 쯤으로 해석할 수 있다.
4. 관찰
휘트먼은 차라리 빈둥빈둥 놀려, 자신의 영혼을 불러낸다. 그리고 그는 그 흔한 여름 풀잎을 관찰한다. 여름 풀잎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가 있다. 다른 풀잎을 인용하거나 더 곧게 자라고 아름다운 풀잎 앞에서 기가 죽지 않기 때문이다. 이 여름풀잎은 “나는 나다”라고 외치기 때문에 신적이다. 이 여름풀잎은 자신이 뿌리를 내린 그 장소에 그 순간에 스스로 몰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예배 대상이 된다. 우리가 풀잎에서 ‘신’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최첨단 자동차를 만들고 타고 다니지만, 발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아 오래 걷고 달리는데 필요한 발 근육을 퇴화시켰다. 우리 손목엔 매순간 시간을 알려주는 손목시계를 차고 있지만, 태양, 달, 나무, 꽃, 풀잎, 강, 바람 등 자연이 알려주는 시간을 감지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인터넷을 통해 세상의 모든 지식을 습득하고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친지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한다. 그러나 오늘 밤 하늘에 떠 있는 밤하늘의 별이 무슨 의미인지, 자신은 정작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아니 지금 이 순간 식구나 친한 친구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도무지 알려하지 않고 알 수도 없다. 그들을 만나 얼굴과 얼굴을 보고, 그들의 눈가에 촉촉이 젖은 눈물을 보고, 그들의 떨리는 음성을 통해, 그들의 열망을 직접 듣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실 되게 살면, 우리는 진실을 보게 될 것이다. 인간이 가만히 눈을 감고 ‘나는 나다’라고 외치는 여름 풀빛의 속삭임을 들을 수가 있다면, 그는 이미 신을 만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