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배철현의 아침묵상2] 좌정坐定

2017-06-11 20:00

II.
 

                                              배철현교수

 

[사진]



하루
‘하루’는 위대한 나를 새롭게 발견하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수련시간이다. 누구나 ‘오늘’이라는 시간을 통해 저녁에는 새로운 인간으로 변하기를 원한다.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소멸하기 마련이다. 영원히 태양 주위를 돌 것 같은 지구도 50억년 후엔 멈춘다고 한다. 만일 그 시점에 지구의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 어떤 생명이 살아 있다면, 그 생명은 지구의 유구한 삶도 한순간이라고 말할 것이다. 과거나 미래의 시간은 언제나 순간(瞬間)이다. 지금 이 시간도 그것을 인식하여 온전하게 나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면, 멈추지 않는 강물처럼 슬며시 과거로 흘러가 버릴 것이다.
미래(未來)는 그 한자가 의미하는 것처럼, ‘아직 오지 않는 어떤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미래’라는 의미는 오히려 영어단어 '퓨처(future)'에서 찾을 수 있다. ‘퓨처’라는 영어단어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는데 ‘존재하다, 되다’라는 동사 '에세(esse)'의 미래 능동 분사형이다. 설명하자면, ‘미래’란 ‘내가 이 순간에 몰입하여 최선을 다할 때 자연스럽게 나에게 다가오는 신의 선물’이다. 오늘이라는 하루를 영원한 순간으로 만들기 위해 하는 의례가 있다. 자신이 정한 장소에서 가부좌를 틀고 가만히 앉아 눈을 감는 행위다. 그 장소는 내게 다른 장소와는 구별된다. 그곳이 특별한 이유는 나를 조금씩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2. 구별된 시간과 장소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간을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양적인 시간을 의미하는 ‘크로노스’와 순간이 영원이 되는 질적인 시간인 ‘카이로스’다. 카이로스는 자신을 위해 최선을 발견하기 위한 시간이다. 유대인들은 이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일주일에 하루를 구별하였다. 그리고 그날을 '싸바쓰(sabbath)'라고 불렀다. ‘싸바쓰’에 대한 번역 '안식일(安息日)'은 그 원래 의미를 잘 전달하지 못한다. ‘싸바쓰’는 ‘자신이 습관적으로 하던 일을 강제로 그만두다’라는 의미다. 유대인들은 일주일에서 하루를 구분하여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였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하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어렵다. 그들은 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無爲)를 역설적으로 ‘거룩’이라고 불렀다. ‘거룩한 삶’이란 기성종교나 전통이 정해 놓은 종교시설이나 명소에 가서 신들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일상에서 자신의 최선을 위해 구별한 시간을 엄수하는 습관이다.
수련 초보자는 자신을 연마하기 위해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로 습관적으로 진입해야 한다. 이 장소는 세상의 어떤 장소보다 거룩하다. 내가 그 장소를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티베트의 라싸,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이스라엘의 예루살렘과 같은 곳에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찾아간다. 그곳에서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자신의 일상 속에 숨어 있는 거룩한 장소를 구축하길 꺼린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 수련하는 공간이 천상의 어떤 장소보다도 거룩하다. 왜냐하면, 이곳이 나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거룩한 장소’는 남들이 모두 동의하는 관광명소가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위해 다른 장소와 구분하는 일상이다. ‘거룩’을 의미하는 고대 히브리어 ‘코데쉬’는 '구별(區別)'이다. 유대인들에겐 신과 만나는 천국을 의미하는 특별한 히브리어 단어가 있다. ‘마콤’이다. 그런데 ‘마콤’이란 단어의 실제 의미는 “내가 서 있는 바로 이곳”이란 의미다. 수련의 첫 단계는 일상적인 시공간을 나만의 구별된 것으로 구축하는 노력이다.

3. 좌정坐定
구별된 시간과 장소에서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가만히 앉아 있기’다. 한자로는 ‘좌정(坐定)’이다. ‘앉을 좌(坐)'는 나 자신이 마땅히 존재해야할 그 땅(土)에서 나 자신을 제삼자 인간(人)으로 대면하는 일이다. 내가 있는 일상이라는 땅에서 ‘위대한 나’의 싹이 나오기 때문이다. ‘앉는 행위’는 나 자신을 가장 취약하게 만들어 원래의 나를 찾기 위한 준비다. 인류의 조상들은 400만년 전까지 동아프리카 밀림지대 나무 위에서 살았다. 그 후, 기후가 변해 그들은 먹을 것을 찾아 나무에서 내려와 땅에서 나는 근채류를 캐내 먹기 시작했다. 그때 인류의 조상은 키는 1m 정도, 몸무게는 30㎏ 정도로 맹수의 점심거리였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네 다리가 아닌 두 다리고 걷고 일어서는 이족보행을 시작했다. 그들의 시선이 높아져 맹수들이 다가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두 발로 서서 걷는다는 사실은 인간만의 특징이며 특권이다. 그러나 수련을 위한 좌정은 그 특권을 포기하라는 명령이다. 두 발로 걸어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라는 의식이다.
좌정은 가만히 앉아 두 눈을 감는 행위다. 눈을 감는다는 것은 외부의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에게 몰입한다. '정할 정(定)'자는 앉아서 해야 하는 임무를 알려준다. 이 글자는 위에 특별한 장소를 의미하는 갓머리가 있고, 그 밑에 '바를 정(正)'이 있다. ‘정(正)'은 우주의 원칙이며 내 자신을 위한 최선이다. 그것을 찾기 위해 내가 할 일이 있다. 나에게 유일한 한 가지(一) 임무를 찾기 위해 모든 것을 강제로 그만두는(止) 수련이다. 눈을 감고 좌정하여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탈출하면, 자신의 본 모습이 등장한다. 좌정을 통해 자신의 본 모습, 자신이 열망하는 세계를 떠올리는 행위를 상상(想像)이라고 말한다.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이 좌정과 상상훈련을 사고실험(思考實驗)이라고 불렀다. 그는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춤을 추고 있는 별들의 움직임을 감지하였다.

4. 요가
인류는 아주 오래전에 좌정이 인간의 창의성과 상상력을 획득하기 위한 최선의 길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고대 인도에서는 좌정하는 수련을 '요가(Yoga)'라고 불렀다. ‘요가’라는 산스크리트 단어는 인도 힌두교의 가장 오래된 경전인 리그베다에 등장한다. 기원전 12세기 아리아인들은 철기와 기마문화를 가지고 인도로 들어왔다. 여느 말을 훈련시켜 준마로 만드는 훈련이 ‘요가’다. 요가는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려는 야생마에 전쟁에 투입할 정도의 준마로 훈련시키기 위한 도구인 ‘멍에’를 의미한다. 요가는 자신의 건강을 위한 신체 운동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려는 자신을 절제하여 자신의 최선을 발견하고 연마하는 훈련이다.
요가는 사실 힌두교라는 종교가 등장하기 이전, 인류의 오래된 수련방법이다. 1922년대 영국 고고학자 마셜이 기원전 2600년경으로 추정되는 인더스 문명을 파키스탄 신드에서 발굴하였다. 모헨조다로 문명이다. 모헨조다로 문명은 동시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능가한다. 이곳에서 발견한 한 인장은 요가의 기원에 대해 설명한다. 겉이 미끌미끌한 암녹색 동석(凍石)에 신비한 인물이 좌정해 있다. 마셜은 이 인장을 산스크리트어로 '파슈파티(pashupati)'라고 불렀다. 번역하자면 ‘동물들의 주인’이란 의미다.
파슈파티는 가만히 앉아 있다. 왼쪽에는 코뿔소가 긴 뿔을 휘두르며 달려오고 오른 쪽엔 벵골 호랑이가 앞발을 치켜들고 이빨로 그를 죽일 태세다. 그는 이 동물들의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는 자신만의 거룩한 공간인 제단(祭壇) 위에 앉았다. 두 발은 마주한 채 양 옆으로 펴 있고 두 손도 가지런히 무릎 위로 올려놓았다. 그의 얼굴은 평온해 보이지는 않지만 달관한 표정이다. 그는 신적인 힘을 상징하는 뿔이 양쪽에 왕관을 쓰고 있다. 신은 우리에게 하루라는 시간을 선물로 주었다. 나는 자신을 위한 거룩한 시간과 공간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위대한 자신을 만들기 위해 좌정해본 적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