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 교수 "자신 돌아볼 줄 아는 '위대한 시민'에 주목해야"
2017-05-30 06:00
진행 반병희 논설실장·정리 박상훈 기자 =지난겨울 한국 사회는 촛불로 대변되는 '시민'들의 목소리로 들끓었다. 광장에 모인 이들은 민주주의, 정의 등을 거론하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 2항을 소리 높이 외쳤다.
응축된 열기가 정권교체라는 현실적 결과로 나타난 지금, 광장엔 '개인'들만 남았다. 국가의 부속물 또는 영혼 없는 백성으로 치부되던 존재가 아닌 '깨어 있는 시민'으로서 말이다.
문자, 그림, 종교 등 시대와 영역을 넘나들며 통찰력 있는 인문학을 제시해 온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55)는 '위대한 개인'에 주목한다. 그는 지난해 7월 펴낸 '심연'(21세기북스)을 통해 위대한 국가를 만드는 초석으로서의 개인을 조명했다. 배 교수는 "위대한 개인이란 웅장한 건물을 지탱하는 한 장의 벽돌과도 같다"며 "그 개인은 배움을 통해 매일매일 위대하게 살겠다고 다짐한다. 배움이란 자신이 안주하고 있는 시공간에서 탈출해 자신에게 유일하고 진실한 자아를 발견하고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 기꺼이 행동으로 옮기는 과정이기 때문이다"고 설명한다.
서울 종로구 북촌에 있는 인문과학 인재육성기관 '건명원(建明苑)'에서 배 교수를 만났다.
◆ 진실한 자아 발견하는 '심연'··· "매일 인생의 초보자 돼야"
빠져나오기 어려운 곤욕이나 상황, 마음이나 의식 속의 깊은 곳 등을 일컫는 심연(深淵)을 책 제목으로 쓴 이유는 무엇일까. 배 교수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라며 "메소포타미아의 영웅 길가메시의 이야기를 담은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등장하는 말로, 죽음을 각오하고 바다 밑까지 가서 불로초를 따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입을 뗐다. 실제로 길가메시 서사시 첫 구절은 '심연을 본 자, 내가 그를 세상에 알리리라'다.
배 교수는 "진실한 자아를 발견하는 장소가 바로 심연"이라며 "원래 '끝을 알 수 없는 연못'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위대한 나를 만나기 위해 들어가야 할 심오한 '마음의 연못'"이라고 설명했다. 이 심연을 통해 이익에 매몰된 오래되고 보잘것없는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 책을 '심연으로 들어가기 위해 고민한 흔적'으로 소개하며 "'과거의 나'와 결별하기 위해 매일 아침 처음으로 인생을 맞이하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적었다"고 말했다. 책 표지에 "매일 아침, 기꺼이 인생의 초보자가 되십시오!"라는 문장을 꺼내놓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사실 심연은 성경, 불경 등 다양한 책에서 볼 수 있는 말이다. 그가 이 단어를 선택한 것은 우연은 아닐 터. 배 교수는 "예수가 40일 동안 금식한 것, 부처가 보리수 밑에서 깨친 것도 심연이라고 할 수 있다"며 "사람들은 에베레스트, 북극 등에 가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런 것들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이라고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심연의 단계에 들어서면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지를 깨닫게 되고, 그렇게 되면 몰입할 수 있다. 윤리, 도덕 등도 몰입이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배 교수는 사랑과 교육도 심연에서 비롯됨을 언급하며 "자신에 대한 몰입 없이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며, 교육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를 깨닫는 것'이라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교육의 이상과 현실 간 괴리가 점점 커지는 것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그는 "소크라테스의 철학 자체가 아닌, 소크라스테스의 삶을 이해하고 지향해야 하는 것처럼 특정 직업군을 정해놓고 그대로 아이들을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What do you want'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래야 창의성이 발현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그는 "자신이 정한 길을 당당히 갈 수 있도록 북돋워 주는 선진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의대나 법대에 가야 한다는 인식이 여전히 강고하다"고 꼬집었다.
◆ "리더의 첫째 요건은 자기의 실수를 바로 인정하는 것"
지난 3월 유엔이 발간한 '세계행복보고서'에 의하면 전 세계 155개국 중 한국의 행복지수는 세계 56위다.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인간의 본질, 심연 등을 찾으려는 노력이 부족하거나 그렇게 하기 힘든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을까. 배 교수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고(故)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를 언급하며 "그들은 배경에 상관없이 자기에 집중한 사람들이다. 행복은 누구에게나 일괄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한 가지 기준에 따르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게 고유한 것을 인정하는 데서 나온다"고 역설했다.
총 23차례의 촛불집회 동안 연 인원 1700만명이 참가해 화제가 됐지만, 사회 일각에서는 '개인의 자유, 가치, 사고 등을 찾는 훈련은 안 돼 있고 집단적 분출에만 매몰돼 가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배 교수는 이에 대해 "시민이라는 개념은 프랑스혁명 등을 통해 굉장히 어렵게 얻은 것"이라며 "핵심 가치 두 가지, 즉 평등과 자유를 바탕으로 도시의 질서 안에서 최선의 가치를 이끌어 내는 것이 바로 시민"이라고 설명했다.
또 배 교수는 "유치원 아이들이 훈련 없이 한 줄로 질서 있게 가는 게 불가능하듯이, 공동의 언어 개발 없이는 시민이 될 수 없다'며 "시민의 문법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정의, 도덕, 배려, 경청, 용기 등이 필요하다. 윤리와 도덕이 서양교육의 핵심인데, 이는 보이지 않는다고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 우주를 하나로 묶을 정도의 중요성을 지닌다"고 덧붙였다.
특히 그가 강조하는 것은 경청과 배려다. 인간 내면에는 리처드 도킨스 등도 주장했던 '호혜적 이타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인간 자신이 '외부인'이자 '낯선 자'였기 때문이다. 배 교수는 "'다름'을 수용하는 정교한 방법을 에티켓이라고 한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잘 수용하는 것, 이게 경청이고 가장 중요한 도시문화의 핵심"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어 그는 "리더의 가장 중요한 요건은 자기의 실수를 바로 인정하는 것"이라며 "다윗이 위대한 리더로 인정받는 것, 메디치가(家)가 이탈리아에서 존경을 받는 것도 그런 이유"라고 말했다.
◆ "'위대한 시민', 배려와 경청에서 비롯돼"
항간에 '한국에 지성(知性)이 없다'는 말이 회자된다. 외형적으로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깊이 있는 콘텐츠가 드물기 때문이다. 배 교수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환경에 주목했다. 그는 "지성은 보통 글로컬(글로벌+로컬)과 오리지널이 결합해야 하는데, 우리는 역사적으로 이런 일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전체적인 사회 분위기가 압축적인 경제성장에 혈안이 됐고, 각자 먹고살기 급급했기에 지성이 제대로 자라날 토대가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는 "문재인 정부에서도 문화적 상승·고백·지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경제적 후퇴마저도 명약관화하다"며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에게 유일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고 명토박았다.
배 교수는 심연의 과정을 방해하는 것으로 일부 TV프로그램과 게임 등을 들었다. 그는 "서투르더라도 자기만의 노래를 부르고, 자신만의 춤을 추어야 하는데 남의 것만 베끼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남이 음식 먹는 것, 모창하는 것, 연예인들의 신변잡기식 농담을 통해서는 얻는 게 없다"고 지적했다. '내 것'이 없으니까 남만 바라보게 된다는 말이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 정부는 '문화융성'을 내세우며 각종 정책을 펴 왔지만 결과는 국정농단, '블랙리스트' 등으로 드러난 전횡과 비위였다. 인문, 교양, 공감 등이 강조되는 성숙하고 진일보한 문화를 기대했던 시민 대다수의 기대를 저버린 셈이다. 배 교수가 생각하는 '좋은 문화'는 무엇일까. 그는 "거칠고 유치해 보여도 자신만의 생각과 힘으로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게 아름답다"며 "선진국의 문화가 좋은 문화가 아니라, 자기에 대한 섬세한 관찰로 자기 세계를 표현하고, 각자의 원대한 꿈을 갖게 하는 프로그램이 지속적으로 마련되는 게 좋은 문화"라고 말했다.
배 교수가 한결같이 강조하는 것은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이지만, 그 안에는 '나'나 '너'가 아닌 '우리'의 가치를 발견해야 한다는 깨우침이 있다. 그가 건명원 강의를 통해, 또 책과 TV 등을 통해 전파하고자 하는 '위대한 개인'은 바로 그런 것들을 성찰할 수 있는 시민이다.
"피터 싱어 프린스턴대 교수가 주장한 '동물 해방론'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인종·종교·문화를 떠나 인간이 찾을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상대를 배려하고 그의 말을 경청하는 것, 이게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