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가수 김선주 “아이돌 음악과 성인 가요가 어우러지는 데 일조하고 싶어요”
2017-03-21 11:00
아주경제 김아름 기자 = 사람들은 누구나 저마다 가슴 속 깊은 곳의 꿈을 키우며 살아간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과, 그저 꿈만 바라보는 사람. 두 가지 유형 중에서 우리는 어떤 걸 선택하느냐에 따라 삶의 가치와 질, 방향성이 달라진다. 예컨대, 가수 김선주는 전자에 속한다 볼 수 있다. 무작정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고 마침내 꿈을 찾아 이뤄냈다.
지난 6일 1년 9개월 만에, 자신의 이름으로 내는 두 번째 정규 앨범 ‘여로’의 더블타이틀곡 ‘나쁜사랑’과 ‘등대오빠’로 컴백하며 어르신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올해 나이 마흔 다섯. 인터뷰를 위해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에게 딱 첫 마디를 건넨게 “대학생인 줄 알았어요”였다. 그거 립서비스가 아닌 진짜 팩트다. 그와의 첫 만남, 인터뷰는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 화기애애하게 시작했다.
“(웃음) 제가 각종 행사를 다니면서 정말 느낀 게 정말 많았어요. 이런 가치를 갖고 있는 분야도 있구나 싶더라고요. 스스로 정말 창피했어요. 우리나라 인구의 60~70%를 차지하시는 50~70대 어르신들께서, 힘들게 일하시다가도 작은 행사에 인지도도 없는 제가 노래 불러드리면 흥겹게 춤 추시는 걸 보면서 트로트가 진통제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때 불현 듯 그런 음악을 하고 싶단 생각을 했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음악에 대한 갈등이 심했지만, 어르신들의 흥겨운 모습을 보면서 제가 더 동화되어 가더라고요. 정말 재미있고, 제 색깔대로의 음악을 하자고 시작했습니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사실 김선주는 지난 1998년 ‘로미오’라는 이름의 3인조 남성 아이돌 그룹으로 가요계에 데뷔한 가수다. 당시에는 큰 빛을 발하지 못하고 짧은 활동 후 팀은 사라졌다. 그리고 김선주는 뮤지컬 배우로 전향하며 활동했다. 그리고 그에게 예상치도 못했던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99년도부터 뮤지컬을 시작했는데, 장기 공연을 마치고 집에서 휴식을 취할 때였죠. 다음 뮤지컬인 ‘렌트’의 오디션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저희 고모부님께서 당시 잡지사를 하셨는데, 기러기 아빠졌거든요? 당시 고모부님 가족 분들이 뉴질랜드에 나가 계신데, 고모부께서 다음 작품 하기 전에 뉴질랜드에 한 번 놀러갔다 오라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96년도에 대학교에서 교환학생으로 뉴욕을 갔다 온 적 있었는데 그때의 로망이 있어서 뉴질랜드를 가기로 결심했죠. 뉴질랜드로 가서 어학연수를 하기도 했고, 그러다 대학도 입학하게 됐죠. 거기서 영화방송학과를 들어갔는데, 영화에 빠져서 단편영화를 만들다가 실패했죠. 하하하. 우리끼리 취미로 하기로 했는데 영화가 망하니까 한국에 들어오기가 좀 애매하더라고요. 뮤지컬 배우 활동도 몇 년을 쉬고 있다보니 자신도 없어졌고요. 뉴질랜드까지 와서 이뤄놓은 것도 없이 망한 느낌이 들었는데, 배우도 안되고 가수도 안되고 영화까지 말아먹고 나니 다른 살 방법을 찾아야겠더라고요. 마침 그때 뉴질랜드에서 일본 사람이 하던 스시집을 기회가 돼서 인수하게 됐는데, 교민들을 상대로 장사가 잘 돼서 대박이 났어요. 그때 처음으로 요리를 하게 됐고, 많은 분들이 제 요리를 드시고 좋아하시는 모습이 마치 가수로 무대에 섰을 때만큼 즐거웠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뉴질랜드에서 10년을 생활했습니다.”
“아무래도 구관이 명관이라고, 음식점이 잘 돼도 갈증 해소가 안 되더라고요.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지금의 대표님을 만났고, 음악에 대한 제 열정을 알아보시고 다시 가수로 새롭게 시작했어요. 제가 음악에 얼마나 갈증이 있었냐면요. 모금행사를 가면 강당을 빌릴 수 있으니까 자선 공연을 하면서 노래를 부른 적이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술 한 잔씩 먹고 노래방 가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요. 항상 노래, 무대에 대한 갈증이 있었죠.”
김선주는, 그렇게 늘 품어두었던 꿈을 40대가 돼서야 다시 꾸기 시작했다. 제2의 가수 인생을 시작하는 초반에는 지하 작업실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4개월간 지하실에 있으면서 곡 작업에 매진했죠. 그리고 창법을 바꾸느라 굉장히 힘들었어요. 소위 ‘완뽕’이라고 하는데 지난해는 그냥 제가 트로트를 흉내만 내는 거였더라고요. 사실 트로트는 4분의 4박자에서 계속 창작을 해내야하는 어려움이 있는데 정말 힘든 작업이더라고요. 그래서 아이돌 음악을 내려놓는 다는 건 쉽지 않았어요. 오히려 트로트처럼 쉽게 만드는 게 더 어려웄죠. 네 박자 안에 들지 않으면 어르신 분들이 따라가시지를 못하더라고요. 그럼 제가 좋으라고 만든 음악이지 어르신들을 위한 노래가 아니잖아요. 트로트가 결코 만만하게 볼 장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존중하게 됐습니다. 기라성 같은 선배님들의 노래를 지금도 들어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가 성인가요로 전향하는데 있어서는 우리나라에서는 좁디 좁은 트로트 시장의 저변에 있다. TV만 틀면 흘러나오는 아이돌 음악과는 다르게 트로트 가수들이 설 자리는 거의 전무하다. 그나마 KBS ‘가요무대’나 ‘전국 노래자랑’이 다니까 말이다. 김선주는 그런 가요계의 현상에 진한 아쉬움을 드러냈고, 홀대 받는 성인가요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은 포부를 갖고 본격적으로 트로트 음악 작업을 시작했다.
“미국에서만 봐도 컨트리송은 아직까지도 추앙을 받고 있잖아요. 물론, 컨트리송이 좋은 역사에서 나온 노래는 아니지만요. 우리나라 성인 가요는 너무 홀대 받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성인 가요를 음악적으로 만들어 내고 싶어서 다른 장르를 하는 실용음악과 교수 친구를 만나 곡 작업도 했죠.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이차선 다리’를 작곡한 김민진 작곡가를 만났는데, 알고보니 그 친구가 제가 어릴적에 우연히 알게된 친구더라고요. 그 사실도 모르고 곡 의뢰를 하러 갔는데 그 친구는 어느새 대단한 작곡가가 돼 있더라고요. 정말 신기했어요. (웃음)”
김선주에게는 다소 낯선 트로트 장르에 적응하기 위해 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었다. 위에서 언급했던 김민진 작곡가와 함께, 같은 학교 출신인 배우 임형준. 그리고 유명한 작사가인 김영아까지 김선주를 위해 뭉쳤다. 그렇게 김선주의 두 번째 정규 앨범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아직은 인지도가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다양한 활동을 펼칠 수 있는 건 그의 곁에는 좋은 사람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선주 역시 그런 사람들에게 늘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 노력에 노력이 더해져 지금의 김선주를 만들어 낸 것이다.
“트로트를 부르려면 기존에 발라드를 부르던 창법으로 하면 안된다고 조언을 들었어요. 저는 팔랑귀라서 바로 수용했죠. 제가 이번 앨범의 믹싱이 끝나는 날 스탭 분들과 술을 한잔 하러 갔는데, 엔지니어 분께서 저와 악수를 하시면서 ‘진짜 몇 년만에 음악작업 같은 작업을 한 것 같다’고 칭찬해주셨어요. 그땐 정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열었던, 쇼케이스에서도 취재 와주신 어떤 남자 기자님께서 마지막에 저를 보시면서 ‘얘기도 그렇고 공연도 그렇고 감동적이었습니다’라고 해주셨죠. 그 분 때문에 정말 힘이 났어요. 어떤 분이신지는 모르겠지만 감사패 드리고 싶어요.(웃음) 너무 감사했습니다.”
아이돌 그룹으로 짧았지만 화려했던 과거의 영광을 내려놓고, 김선주는 진심으로 무대를 즐기고 사랑하는 성인 가요 가수로 거듭났다. 길지 않았던 지난 20여년의 시간은 그에게 기회가 됐고, 이젠 진짜 트로트를 사랑하게 됐다. 그리고 그는 가수로서 새로운 목표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르신들 중에서 음악을 듣고 즐기고 싶어 하시는 분들이 엄청 많아요. 하지만 성인가요를 들을 수 있는 곳은 많이 없는 게 현실이잖아요. 예전 ‘가요톱텐’처럼 아이돌 음악과 성인가요가 함께 나오고 어우러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데 제가 아주 조금이라도 일조를 하고 싶어요. 물론, 한류도 중요하고 국가 수입도 중요하지만, 미국의 그래미어워즈 처럼 아이돌 음악과 성인 음악이 함께 무대에 설 수 있는 시상식도 생겨야 한다고 봐요. 국내 가요 시장에서 성인 가요가 설 수 있는 자리를 더 넓히는 일에, 제가 감히 조금이라도 일조하게 된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그게 지금 제가 꾸는 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