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첩보전의 '독살 잔혹사'…최덕근 영사부터 김정남까지

2017-03-02 20:00
말레이당국, 평양서 파견된 블랙요원이 VX가스로 김정남 암살 파악하는듯
96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숨진 고(故) 최덕근 영사도 독침으로 피살

아주차이나 김동욱 기자 = 말레이시아 보건당국이 김정남(46)의 사망 원인이 신경작용제 VX 중독이라는 부검 결과를 확인했다.

이에따라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벌어진 김정남 암살 사건은 정찰총국과 국가보위성 등 북한의 핵심 정보기관들이 강력한 신경작용제 VX를 가지고 만들어낸 '합작품'인 것으로 파악된다.

◆평양서 파견된 블랙요원의 암살 정황

칼리드 아부 바카르 말레이시아 경찰청장이 이달 22일 기자회견에서 김정남 암살 사건의 연루자로 지목한 북한 대사관 2등 서기관 현광성(44)은 대사관에 파견된 보위성 요원일 가능성이 강력하게 제기했다.

말레이시아 외교부가 공개한 2016년 12월 기준 말레이시아 주재 외교관 명부(DIPLOMATIC AND CONSULAR LIST)에서 '2등 서기관 현광성'이라는 북한 대사관 직원은 없었다.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벌어진 김정남 암살 사건은 정찰총국과 국가보위성 등 북한의 핵심 정보기관들이 강력한 신경작용제 VX를 가지고 만들어낸 '합작품'인 것으로 파악된다. 사진은 김정남(아래 오른쪽)의 소년시절 김정일(아래 왼쪽)과 함께 촬영한 가족사진.[아주차이나DB]


칼리드 청장이 기자회견장에서 공개한 사진 자료에 따르면 현광성의 말레이시아 도착 날짜는 이보다 앞선 2016년 9월 20일이다.

현광성이 외무성 출신이 아니라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활동하는 보위성 소속 '블랙요원'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주장이다.

블랙 요원은 신분을 감춘 채 상대국에서 암약하는 비밀 스파이를 말한다. 공식적인 신분이 없어 적발되면 간첩 혐의로 기소된다.

아시아 지역에서 대사를 역임한 전직 고위 당국자도 "북한 대사관에 파견된 보위성 요원에게는 보통 2등 서기관 직함을 주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해외 테러나 요인 암살 등의 임무를 주로 수행하는 정찰총국은 보위성의 협조를 받아 김정남 암살 계획 실행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북한 권력기관에서 근무하다 한국으로 망명한 한 고위급 탈북민도 "김정남 암살 같은 작전에는 보위성과 정찰총국 요원들이 모두 동원된다"며 "보위성은 작전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실행은 정찰총국 요원들이 하는 식"이라고 말했다.

그는 "평양으로 도주한 용의자들이 정찰총국 실행조이고, 현광성이 대사관에 남아 있었다면 보위성 요원이라고 보인다"고 견해를 밝혔다.

여기에 '제3의 기관'인 북한군 산하 생물기술연구원이 이번 암살의 '집행부서'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대외적으로는 생물농약 연구기관으로 알려진 이 기관의 개입이 사실로 확인된다면 암살에 사용된 물질 개발 등에 중심적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VX가스로 공개된 장소에서 대범하게 요인암살

말레이시아 경찰은 말레이 화학국이 부검 샘플을 분석한 결과 VX로 불리는 '에틸 S-2-디이소프로필아미노에틸 메틸포스포노티올레이트'가 사망자의 눈 점막과 얼굴에서 검출됐다는 잠정 결론을 담은 보고서를 지난 24일 제출한 바 있다.

VX는 현재까지 알려진 독가스 가운데 가장 유독한 신경작용제로 수 분 만에 목숨을 빼앗을 수 있다.

이 독가스는 특별한 냄새와 맛이 없지만 호흡기, 직접 섭취, 눈, 피부 등을 통해 인체에 흡수되면 사린가스보다 100배 이상의 독성을 발휘한다.

독가스 등 눈에 보이지 않는 독성물질을 사용한 암살은 첩보영화에나 나올법한 예사롭지 않은 수법으로 보일 수 있지만, 독살은 세계 곳곳에서 널리 사용되는 암살 방법이다.

독살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1978년 영국 런던에 망명 중이던 불가리아 반체제 인사 게오르기 마르코프가 인체에 치명적 독성물질인 리친(Ricin)이 묻은 우산에 찔려 사망한 사건이 꼽힌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독 우산' 공격을 당한 그는 사건 나흘 후 숨을 거뒀다.

2004년에는 러시아가 지지하는 우크라이나 보수 여당 대선후보 빅토르 야누코비치에 맞서 출마했던 진보 성향의 야당 후보 빅토르 유셴코가 맹독성 화학물질인 다이옥신 중독으로 얼굴이 크게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유셴코의 지지자들은 러시아연방보안국(FSB)이 그 배후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 이후 동요하던 중도성향 유권자들이 유셴코 쪽으로 급속히 기울면서 그는 최대 라이벌인 야누코비치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2006년에는 영국으로 망명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정부를 노골적으로 비판하던 FSB 전 정보요원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가 FSB 요원 2명을 만나 차를 마시고 돌아온 뒤 쓰러져 약 3주 만에 숨졌다. 그의 체내에서는 폴로늄-210이 다량 발견됐다.

◆북한, 외교경로로 수집된 정보 활용…해외서 암살 일삼아

북한은 이전에도 공작 요원들을 해외로 보내 대한민국 요인에 대한 암살과 공격, 납치를 감행한 역사가 있다. 

1968년 1월 21일에는 북한군 대남 침투공작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 습격과 요인 암살을 위해 서울로 침투했다.

1983년 10월 9일에는 미얀마를 방문 중이던 전두환 당시 대통령과 수행원들을 노리고 아웅산 묘역 테러를 저질렀다. 이 사건으로 모두 21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했다.

1996년 10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괴한의 공격을 받고 숨진 고(故) 최덕근 영사 피살 사건도 북한이 배후인 것으로 추정되지만 미궁에 빠져 끝내 실체가 드러나지 않고있다.

고 최 영사는 국정원 요원으로 주 블라디보스톡 영사관에서 '화이트'(상대국에 공식 외교관 신분으로 파견되는 무관이나 정보기관원. 이른바 ‘공인된 스파이’를 지칭)로 일하다 자신이 거주하던 아파트 계단에서 피살됐다.

검시 결과 원통형 물체로 머리를 8차례나 가격당해 심한 두개골 손상을 입었고 예리한 물체로 우측 옆구리 부분을 찔린 것으로 드러났다.

시신에선 북한 공작원들이 독침에 사용하는 독극물 성분이 검출됐다. 최 영사는 피살될 무렵 북한의 달러 위조와 마약 밀매를 추적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국내 당국은 북한이 남측 외교관의 대북 정보 활동을 위축시키기 위해 최 영사를 살해한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러시아 수사 당국은 사건 초기 북한과의 관계 등을 고려해 북한 공작원 개입 의혹 규명에 미온적 태도를 보이며 단순 살인사건으로 종결지으려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외교 소식통은 "러시아 측이 한국 측의 요청으로 수사 지속 입장을 밝혔지만 아직 진척 상황에 대해 알려온 바 없다"면서 "제대로 수사를 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라고 밝혔다.

이 소식통은 "우리 관계 당국은 사건과 관련된 살해범들을 지속적으로 추적해 왔고 최근에도 관련 인물을 추가 확인했다"고 전했다.

우리 정부가 러시아 당국의 수사와는 별도로 범인 추적을 계속하고 있으며 일부 성과가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부분이다.

다른 정부 관계자는 "러시아의 사법권과 관련한 사안이지만 러시아 측에 계속 관심을 갖고 협조를 해달라는 요청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최 영사 피살 사건에 대한 공소시효도 우리 측의 지속적 요청으로 중단된 것으로 알려졌다.

공소시효가 중단된 만큼 수사를 통해 용의자가 검거되거나 이와 관련된 증거를 확보하면 언제든 공소 제기가 가능하다. 현재 사건 수사는 연해주 소비에트 지역 검찰청이 맡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2000년 1월 중국에서 탈북자를 돕다 납치된 김동식 목사도 북한 여성 공작원에 의해 납치돼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북한은 유해를 송환하라는 우리쪽 요구조차 외면하고 있다.

2011년엔 김창환 선교가가 중국 단둥에서 독극물에 의해 피살됐고, 지난해 4월에도 중국 지린성에서 한충렬 목사가 야산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1997년에는 김정일의 전처 성혜림(사망)의 조카로, 한국에 귀순한 이한영 씨가 경기도 분당 모 아파트에서 남파 간첩의 권총에 맞아 열흘 만에 숨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