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범죄의 여왕' 박지영, 어른의 조건
2016-08-30 07:00
미경은 종잡을 수 없는 여자다. 영화 ‘범죄의 여왕’ 속 미경은 그야말로 종횡무진, 동분서주하는 인물이니까. 아들을 위해서라면 겁날 게 없고, 고시촌 아이들 모두가 제 자식 같은 그녀는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여기저기 파헤치지만 도무지 밉지 않은 여자기도 하다. ‘아줌마’ 또는 ‘엄마’라는 존재를 새롭게 풀이한 미경은 딱 배우 박지영을 위한 캐릭터기도 하다.
영화 ‘범죄의 여왕’(감독 이요섭·제공·배급 ㈜콘텐츠판다·공동제공 공동배급 TCO㈜더콘텐츠온·제작 광화문시네마)은 아들이 사는 고시원에서 수도요금 120만 원이 나오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가 또 다른 사건을 감지한 ‘촉’ 좋은 아줌마 미경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박지영에게 ‘범죄의 여왕’은 마치 선물과도 같았다. “중년의 여성에게 주어지는 누군가의 엄마, 어떤 아줌마 역”이 아닌 능동적이고 진취적이며 사건을 끌어가는 뉴타입의 캐릭터였던 것이다.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야호! 소리를 질렀”고, “앞뒤 따지지 않고 출연료도 생각지 않고” 출연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박지영에게 선물처럼 찾아온 작품은 관객에게도 신선하고 짜릿한 경험을 안겨준다. 특히 미경이라는 캐릭터는 이제까지 한국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색다른 여성 캐릭터기도 하다.
“이런 게 진짜 여성 영화죠. 여자가 주연이라고 많이 나온다고 여성 영화가 아니라는 거예요. ‘아멜리에’나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처럼, 여성이 어떤 작품의 색감이나 정서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해요. 그런 면에서 ‘범죄의 여왕’은 앞선 영화들의 방식을 따르고 있죠. 약간의 B급 감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마저도 정말 좋았어요. 딱 독립영화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들, 그 자유로움을 안고 있는 영화죠.”
앞선 언론시사회에서 강하준 역을 맡은 허정도는 “박지영이 꼰대가 아니라 좋았다”고 말한 바 있다. 자칫 서먹한 분위기로 이어질 수 있는 말이었지만, 박지영은 이를 죄 드러내고 웃기만 했다. 후배들과 스스럼없이 지냈다는 말이 허투루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는 후배들에 대한 그녀의 관심 또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그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몰랐다.
“새로운 친구들과 호흡을 맞출 수 있는 건 정말 기쁜 일이에요.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랄까. 이번 작품에서도 솔직히 다 모르는 친구들이었는데 그들의 자세, 방식 같은 게 저를 긴장시키더라고요. 그들을 만나서 하나씩 연기를 맞춰보면서 새로운 저의 모습을 꺼낼 수 있게 됐어요. 이들과의 케미스트리가 다른 게 아니라 액션, 리액션에서 승패가 좌우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마치 미경 같다. 후배들이 사랑하는 선배, 박지영은 타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그득 품고 있었다. 인터뷰하는 동안에도 그의 애정과 관심을 물씬 느낄 수 있었는데 “사랑받는 선배로서의 비결”을 묻자, 그는 대답보다 먼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전 원래 사람을 좋아해요. 사실 저도 모르겠어요. 아! 그건가. 애들에게 워낙 관심이 많아서 아주 사소한 변화까지 알아차릴 수 있어요. 예를 들어서 후배가 앞머리를 잘랐다면 저는 바로바로 ‘앞머리 잘랐구나! 완전 귀여워!’라고 칭찬해주곤 해요. 빨리 알아차리고 표현해주고 칭찬해주고. 제가 일찍이 아이들을 키워서 그런가 그런 칭찬에서는 아낌이 없어요. 저는 우리 어른들이 젊은이들에게 어떤 사람이 될 건지 늘 고민해요. 길을 열어주는 사람으로 남게 될지, 그 길을 피하고 싶은 사람이 될지 모르겠지만…. 피하고 싶고 매력 없는 사람이 아니길 바라요. 쉽게 제게 전화해서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박지영의 남편 윤상섭 전 PD는 미경을 보고 “너의 얼굴을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전까지 줄곧 카리스마 넘치는 역할을 해왔던 그가 이제껏 대중에게 보여주지 못한 얼굴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딱 박지영다운 캐릭터를 이제야 만났다는 것, 그리고 이제야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아쉬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다 장녹수 때문이야. 하하하. 말은 이렇게 해도 저는 제 이미지들을 좋아해요. 약간 세고, 카리스마 있는 이미지들? 아마 나랑 비슷한 캐릭터를 계속 보여줬다면 아마 이렇게 연기를 오래 할 수 없었을 거예요. 실제 내 모습은 모습이고 연기는 직업이니까. 어느 순간에는 그런 화려한 캐릭터가 고맙더라고요. 그것 덕분에 내가 연기를 하는 거고. 좋은 포지션에 제 인성이 쌓여서 나이를 잘 먹으면 제 인생이 얼굴에 드러날 거로 생각해요.”
강한 이미지에서 친근한 이미지로 자연스럽게 이미지 전환에 성공한 박지영. 그는 ‘범죄와의 여왕’ 개봉에 있어 “가장 기대하는 부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많은 감독과 관객, 작가가 있는데 왜 ‘다른 얼굴’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요. 그래서 여성 영화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저도 제가 어떤 얼굴인지 모르는데 그런 다른 모습을 끄집어내는 감독을 만나고 싶은 거예요. 이번 작품을 통해 완벽하게, 충분하게 해냈으니까 많은 분이 봐준다면 좋을 것 같아요. 이런 작품이 잘 돼야 이런 새로운 감독들 새로운 사람들도 마음껏 펼칠 수 있어요.”
진짜 어른.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한 과정들. 박지영은 착실히 그 일련의 과정들을 차근차근히 밟아나가고 있었다. 그는 앞으로도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갈 거고, 그것들이 곧 자신을 ‘좋은 배우’가 되는 길로 안내하리라 믿는다.
“제 최종 목표는 좋은 인간이 되는 거예요. 아이들이 제가 떠나고 난 뒤에 ‘야, 우리 엄마 진짜 괜찮은 인간 아니었나?’고 말할 수 있길 바라요. 존경까지는 자신 없고…. 그냥 사랑받고, 사랑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요. 제가 60대쯤엔 나이젤 콜 감독의 ‘오 그레이스’ 같은 영화를 찍을 수 있길 바라요. 예전엔 그런 상상이 막연하게 느껴졌는데 요즘은 많이 달라진 걸 느껴요. 나이든 배우들도 좋은 배역, 새로운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게 된 거예요. 제작자, 감독님 마인드가 달라진 거죠. 선배들도 왕성하게 활동하시니까 우리도 가능성이 있구나 싶은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