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최송희 기자 = 아무도 몰랐을 거다. 지적이고 섹시한 배우의 대표 격으로 불리던 배우 박희순(46)의 화려한 몰락을. 어떻게 그가 13년째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가여운 서른아홉 살의 아저씨가 될 거라 상상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는 너무나 당당하고 너무나 지질하게 만년 고시생 수탁이 되었다. 손바닥 뒤집듯 말끔하게, 박희순을 둘러싼 수많은 정갈한 이미지를 전복시킨 것이다.

8월 25일 개봉되는 영화 ‘올레’(감독 채두병·제작 ㈜어바웃필름· 제공 ㈜대명문화공장·배급 ㈜대명문화공장 리틀빅픽처스)는 인생에 적신호가 뜬 세 남자의 일탈을 그린 작품이다. 다 때려치우고 싶은 순간 대학 선배 부친의 부고 소식에 제주도로 모인 세 남자가 생각지 못한 일들을 겪으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아냈다.

박희순은 이번 작품에서 사법고시 패스만을 13년째 기다렸지만, 사법고시 폐지로 인해 갈 길을 잃은 수탁 역을 맡아 열연했다. 그야말로 역대급 지질이 연기를 소화한 그에게 수탁에 대한 이야기를 묻고, 들어보았다.
박희순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지질한 캐릭터였다
- 제가 무슨 김우빈 같은 20대 청춘스타도 아니고. 하하하. 이미지 때문에 걱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너무 지질해서 (캐릭터를) 선택한 거다. 그동안 센 역할을 자주 보여드렸기 때문에 이런 역할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는 계기라 여겼다.

헤어스타일도 화제였다. 수탁의 지질함을 업그레이드시키는 듯했다
- 이렇게 이슈가 될 줄은 몰랐다. 다들 헤어스타일에 관해 말씀하시더라. 저는 그동안 센 역할을 많이 했기 때문에 ‘올레’를 보자마자 아! 지질한 역할이구나! 단번에 알 수 있기를 바랐다. 수탁과 조금 더 가깝게 만들고 그 인지하는 시간을 단축하려고 한 거다.

놀라운 비주얼이긴 했다.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가 되었더라도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을 것 같은데
- 인정한다. 최악의 비주얼에 못생김의 절정을 달리고 있다. 하하하. 이 역할 하면서 예쁘게, 멋지게 보일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런데도 훨씬 더 못생기게 나왔다.
시나리오를 봤을 때 수탁의 첫인상이 궁금하다
- 재밌고 엉뚱한 친구지만 그 안에 있는 아픔이 읽혔다. 어떤 일을 십여 년간 해왔는데 갑자기 그 일을 멈추게 되었으니 얼마나 답답하겠나. 그 슬픔과 답답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소심하고 소극적인데 긴 시간 동안 자기주장을 할 수 없어 끝내 조울증 증세까지 겪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영화 속 많은 웃음 포인트가 있는데 그것 외에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웃음이 터지기도 한 것 같다
- 의외의 지점에서 웃으시더라. 술 취한 수탁이 ‘사랑은 용기야!’하고 외치는 신이었다. 관객들이 수탁이라는 인물을 잘 파악하고 계시구나 싶었다. 용기도 없고 사랑도 못 해본 인물이 자신과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니. 웃픈(웃기고 슬픈) 상황으로 받아들이시는 것 같았다.

연기하면서 가장 수탁과 가까운, 최적화되었구나 싶었던 장면이 있다면?
- 고백할 때다. 굉장히 시적인 장면인데 이상한 부분이기도 하다. 하하하. 수탁의 마음을 전부 표현할 수 있었고 감정이 살아야 수탁에 대한 연민 느껴질 거로 생각했다. 코믹하게 갈 것이냐 진지하게 갈 것이냐 고민을 많이 했었다. 감독님과 이야기한 결과 진심으로 연기했으면 하고 바랐다. 내가 생각했던 몸짓이나 제스처 같은 건 내가 생각했던 대로 하면서 감정을 진심으로 가려고 노력했다.

디테일한 연기가 극의 코미디를 더 매끄럽게 만든 것 같다
- 저는 웃프다는 신조어가 마음에 든다. 진지한 상황 속에서도 유머가 있고, 웃긴 장면이어도 페이소스가 있는 장면들을 좋아하는데 수탁이 등장하는 장면이 딱 그런 신인 것 같다. 자살을 위해 약을 먹으려고 하는데 일말의 자존심 때문에 망설이는 것이다. 마지막을 더럽히고 싶지 않은 수탁의 세심함이 캐릭터를 잘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극 중 수탁만 홀로 제주도에 남는다. 수탁은 이후 어떻게 지냈을까?
- 안 그래도 우리끼리 그런 얘길 했다. 수탁이는 뭘 했을까…. 아마 해남이 되지 않았을까? 하하하. 감독님이 2탄을 만들려고 남겨둔 건 아닐까 싶다. 전복을 잡고 지냈을 거다.

사랑에 빠진 루비를 만날 줄 알았는데?
- 사랑보다는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골방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것 같고. 제주도의 나비를 따라 자기 생각을 정리했을 것 같은데.

세 배우와 채두병 감독님이 워낙 친해 보이더라
- 우리는 술자리로 돈독해진 사이다. 모든 걸 주도하는 건 감독님이시고. 하하하. 감독님께서 우리 셋이 캐스팅되자마자 단체 카톡방을 만들었다. 매일 아침 6시마다 캐릭터에 대한 해석이나 정보 같은 얼 알려주시는데…. 희망퇴직이나 고시생의 애환 뭐 이런 글이었다. 물론 저야 고시생의 애환 글을 보면 좋지만 딴 친구는 무슨 죄죠? 하하하. 카톡은 사담하고 재밌는 공간인 줄 알았더니 학습 공간이더라.

코미디 영화라서 그런 걸까. 오랜만에 만난 박희순의 이미지가 많이 달라졌다. 기자간담회나 V앱 등을 보면 예전보다 유쾌하고 능청스러워진 것 같다.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 같은데?
- 오랜만에 망가진 역을 하는데 거기에서 점잔 빼봤자. 캐릭터에 맞지도 않고…. 하하하. 물론 제게도 여러 가지 면들이 있다. 그중에서 흥을 더 뽑아내려고 노력하는 거다. 예능에서 제 모습을 보이는 건 부담스럽지만, 영화 속 내 인물을 대변하는 거니까. 망가지는 게 쑥스럽다거나 꺼려지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