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86]5·16···박정희와 목당의 첫 만남

2016-08-10 16:56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86)
제5장 재계활동 - (81) 5·16혁명과 재계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5월 16일 새벽 수도 서울 거리엔 난데없는 총성이 요란했고 얼룩무늬의 복장을 한 군인들이 요소요소에 배치되었다.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금융동결(金融凍結)과 공항·항구의 봉쇄, 각급 의회(議會)의 해산령이 내려졌으며 군사위원회(軍事委員會)가 정권을 인수하였다. 라디오는 혁명공약(革命公約)을 되풀이 방송하고 있었다.

목당(牧堂) 이활(李活)이 협회에 나갔을 때는 오정수(吳楨洙) 부회장(副會長)이 나와 있어 두 사람은 혁명공약을 놓고 혁명주체(革命主體)의 성격을 규정해 보았다.

첫째, 군사 혁명위원회가 반공(反共)과 친미외교(親美外交)를 국시(國是)로 삼겠다는 점.

둘째, 사회혁신계(社會革新系)를 주로 한 좌익분자(左翼分子)들의 난동으로 혼란과 사회 불안이 심화되고 있던 국가 사회의 기틀을 바로 잡겠다는 점.

셋째, 구악(舊惡)과 파쟁을 차제에 일소 청산하겠다는 점.

그리고 군사혁명 당국이 내세운 6대 목표의 하나인 이른바 기아선상(飢餓線上)에서 허덕이는 민생고(民生苦)를 시급히 해결하기 위해 자유경제 체제를 극력 신장시키겠다는 점 등의 관점으로 보아서 재계(財界)로서는 일단 환영할 만하다는 견해로 집약되는 듯했다.

목당은 무력한 장면 정권(張勉 政權)에 절망을 느껴왔던 터이다. 지도력을 상실한 정권에는 기대할 것이 없었다. 그러던 터에 강력한 군사정권이 들어앉아 구악을 척결하여 정치·사회 기풍을 일신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정치의 기강(紀綱)을 바로잡고 경제·사회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선 군사혁명이란 거친 처방도 부득이하다고 군사 당국은 판단한 모양이었다.

목당은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렸다. 문제는 혁명위원회가 사태수습에 능력을 보이는가 하는 것이 걱정이었다. 미 8군의 향배와 미국 정부의 태도가 문제였다.

5월 18일, 경제협의회(經濟協議會)의 운영위원회에서 5개 경제단체 연석회의를 갖자는 제의가 있어 이동환(李東煥) 부회장이 파견됐다. 이날의 연석회의는 우선 재계(財界)의 총의(總意)를 담은 경제정책 원칙에 대한 건의서(建議書)를 군사 혁명위원회에 제출키로 합의하고 기초위원회(起草委員會)를 구성, 5월 19일에는 건의서를 군사 혁명위원회에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국가재건최고회의(國家再建最高會議)의 경제정책 자문위원회로부터 목당과 운봉(雲峰) 전택보(全澤珤)를 지명하여 면담을 요청해 왔는데, 경제정책 수립에 대한 의견을 듣자는 것이었다.

안내된 최고회의 접견실(接見室)은 무장을 한 박정희(朴正熙) 소장이 부관들을 거느리고 앉아 있었다. 목당은 소신껏 무역입국론(貿易立國論)을 개진했다. 영국이 자원을 갖지 못하는 작은 섬나라이면서 세계를 재패할 수 있었던 것은 자유무역 정책을 채택한 데 있었음을 지적하고 가공수출(加工輸出)에 역점을 두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개방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했다. 박정희 의장은 그의 말을 경청했고, 앞으로도 자문에 응해줄 것을 부탁했다.

목당은 이날의 회견에 만족했다. 혁명위원회가 과감한 실천의지를 보이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그간 목당은 입을 다물고 살아 왔을 뿐 여간 무관한 사이가 아니고서는 무역입국론을 거들먹거리지 않았다. 진지하게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치가들은 정치적 안정이 있어야 무역도 될게 아니냐는 생각들이었고, 경제관료(經濟官僚)들은 통화 안정이 있어야 생산 활동도 있고 무역도 될게 아니냐는 생각들이었다. 그야 정치의 안정도 필요하고 통화 안정도 필요하다. 그러나 정권의 안정을 위한 집권당의 안정 노력이 국책(國策)일 수 없고 통화의 안정이 국책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목당의 주장은 자유무역을 국시(國是)로 하고 기간(基幹)으로 하여 국리민복(國利民福)을 도모하자는 것이었다. 무역 진흥을 위해 정치의 안정과 통화의 안정이 필요하다는 논리인 것이다. 영국에서 반보호무역(反保護貿易) 운동이 있었던 것은 19세기 중엽이 아니던가.

공개집회 석상에서 곡물법(穀物法) 반대연맹(反對聯盟)의 연사들이 프랑스·러시아와 영국 세 나라에서 파는 같은 가격의 빵을 전시했는데 제일 작은 것이 영국 빵이었다. 영국만은 이만큼 손해를 보고 있다고 설명이 따로 필요 없었다.

이러한 전시효과(展示效果)는 원면과 함께 밀을 수입하고 있던 랭커셔의 제조업자들에게는 성공적이었다. 반면 농업 방면의 이해 관계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향사(鄕士, 시골선비)들과 소작인들은 거듭 외쳤다.

“곡물세(穀物稅)를 폐지하면 영국의 농업은 멸망하게 된다.”

이리하여 농촌의 지방 귀족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보수당(保守黨)은 자유무역에 반대, 곡물세의 유지에 찬성한다는 태도를 표명했다. 그러나 보수당의 지도자인 로버트 필은 자유무역을 지지했다. 그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유능한 재정가(財政家)인 동시에 행정가(行政家)이기도 했으며 독단적이면서도 의회와의 긴밀한 접촉을 유지했었다.

그는 1842년에 관세(關稅)에 손을 대어 관세 대상품목을 1200종에서 750종으로 감소시켰다. 세입부족(歲入不足)을 보충하기 위해 연액 150 파운드 이상의 소득에 대해서 1파운드당 7펜스의 소득세를 새로 부과했으며, 1845년에는 관세 대상 품목을 450종으로 줄였다. 이리하여 필은 빠른 걸음으로 자유무역에 기울어져 갔다. 계속된 관세 품목 정리는 놀랄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무역량(貿易量)과 소득액(所得額)이 증가하여 국고수입(國庫收入)은 줄기는커녕 오히려 늘게 되었던 것이다. 자유무역주의자였던 여왕과 앨버트 공(公)은 “경(卿)이 나라를 살렸다”면서 칭송하여 마지 않았다.

1850~1837년 사이는 영국으로서는 굉장한 번영기였다. 인구의 증가, 철도의 발달, 해외 식민지의 건설 등이 번영의 기초였다. 농민도 이 혜택을 받았고 평민은 없어졌다. 보호무역은 죽었을 뿐 아니라 지옥에 떨어져 버렸다고들 했다. 경제적인 자유주의는 이때 영국의 신조가 된 것이다.

목당은 영국의 번영사를 연구하면서 조국이 광복되었을 때 살아갈 길은 자유무역을 채택하는 길뿐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