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80]8대 무협 회장 취임과 참의원 선거 출마

2016-08-05 17:52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80)
제4장 재계활동 - (75) 무협 회장으로 복귀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4·19 학생혁명(學生革命)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과도정부(過渡政府)가 들어앉자 한국무역협회에도 변혁의 바람을 타야 했다. 제7대 회장 강성태(姜聲邰)는 자유당 정권 때 상공부장관을 지낸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공직인 회장직을 내놓아야 했다.

5월 19일에 열린 제14회 정기총회는 협회의 혁신적인 개혁을 가져올 새로운 회장단과 임원을 갈았다. 그동안 1953년 5월 피난지 부산 정치파동기(政治波動期)에 제4대 회장 이활(李活)의 후임으로 들어선 임문환(任文桓)은 1954년의 정기총회에서 최순주(崔淳周)에게 자리를 넘겼다.

임문환·최순주·강성태로 이어지는 회장 3대는 자유당의 입김이 작용한 정치인사(政治人事)였던 것이며, 이제 4·19를 치르자 회장단이나 임원 인사는 종래의 민주적인 방식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정기총회 개회사(開會辭)에서 강성태 회장은

“이제 새로운 정신으로 새로운 시대에 대처해야 될 줄 압니다. 관(官)에 아부하지 말고, 관에 끌리지 않고, 또 사리(私利)만을 위하여 곡론(曲論)하지 않고, 강력한 업계를 재형성해 나가야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거대하고 참신한 사업은 보다 유능하고 열의있는 인사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임기 만료로 인한 임원의 개선을 하게 되는 오늘의 총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으며, 업계의 촉망을 받을 수 있는 역량과 덕망있는 회장과 부회장을 선출하여야 될 줄 압니다”라고 했던 것이다.

이날의 임원 개선을 보면 현회장단(現會長團, 회장 강성태, 상근부회장 정운근(鄭雲近), 부회장 주요한(朱耀翰), 오정수(吳楨洙), 한종민(韓宗敏)에서 9명의 전형위원을 선출하여 전형위원회에서 60명의 이사 및 감사를 선출하고 그에 의하여 구성된 임원회(任員會)에서 회장단을 선임토록 결의하였는데, 임원회는 전원 일치로 회장에 목당(牧堂)을 선출했던 것이다.

회         장   이   활
상근부회장   정운근
부   회   장   주요한, 박병교(朴炳敎), 조영일(趙榮一)
전무   이사   김봉진(金奉鎭)

총회의 결정을 가지고 조영일 이사와 오학근(吳學根) 총무부장이 목당을 집으로 방문했다 목당은 무역협회 회원 상사들이 그를 잊지 않고 다시 불러 준 데 감사했다. 그럼에도 목당은 이들에게 하루의 유예를 요청했다. 목당으로서는 고대 재단 주무이사로서 이사들의 양해를 구한 다음에 처신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목당은 이날 창동의 수당(秀堂) 김연수(金秊洙)와 계동의 아주(娥珠) 미망인(인촌 김성수의 부인)을 찾아 양해를 구했다.

이리하여 목당은 다시 무역협회 제8대 회장으로 복귀했다. 그간 무역협회는 업계의 발전과 더불어 큰 단체를 이루고 있었다. 미도파 건물을 불하받아 무역회관으로 하고 3층을 협회로 사용하고 있었다. 무역회관은 불하대전(拂下代錢)을 모금할 때 출자한 회원 상사와 무역협회 사이에 재산권 지분(財産權 持分)을 갖고 말썽이 있었지만 원만한 해결을 보아 무역협회 4, 출자자(出資者) 6이란 비율로 낙착을 지음으로써 무역회관 운영위원회가 관리 운영을 해오고 있었다.

그 뒤 1966년에 가서 협회는 지분주식(持分株式)을 대한농산계(大韓農産系)의 진흥기업(進興企業)에 2억 원에 팔고 오늘의 회현동 종합무역회관(綜合貿易會館)을 건립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무역협회에 복귀한 목당은 옛집에 돌아온 그런 기분이었고, 그 동안 소원했던 회원들을 만나 다시 협력을 다지는 일로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던 터에 6월 27일, 민의원(民議院) 및 참의원(參議員) 선거일자를 7월 29일로 공고하고 28일, 민·참의원 후보자 등록사무가 개시되자 고향 영천의 유지들이 목당의 출마를 권고하러 신당동 목당의 집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영천이씨(永川李氏) 집안에서도 사람을 보내왔다. 그러나 목당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고대 학생 대표들이 출마를 종용해 왔었기 때문이었다.

원래가 영천은 야당 기질을 보여 온 지역으로서 권중돈(權仲敦) 의원(2, 3, 4, 5, 8대 국회의원)의 지반이 두터웠다. 갑·을구로 두 명의 국회의원을 내게 되어 있었다.

권중돈은 동향(同鄕)인데다가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 동창이란 연고가 있어 그와의 타협이 이루어지면 목당도 당선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세상은 바야흐로 혁신을 요구했고 참신한 정치풍토가 조성돼야 할 마당에 국정(國政)에 참여하는 것도 보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