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30]입법의원 구성됐으나 제구실 못해

2016-07-07 18:49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30)
제2장 재계활동 - (25) 입법의원(立法議員) 피선(皮腺)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송호정(松湖亭) 집은 태웠지만 조(趙)씨 부인의 담력과 기지로 일가의 목숨을 구한 것은 천만 다행이었다. 서울로 올라온 집안을 맞이하면서 그들이 당한 이야기를 들으며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치를 떨었다. 아버지 석와(石窩) 이인석(李璘錫)이 민심을 잃어가며 재산을 모은 것도 아니며, 석와는 늘

“내가 당대에 만석꾼이 되었지만 인심 잃은 적은 없어.”

하고 입버릇처럼 말해 오지 않았던가. 실제로 손자 병린(秉麟)이 성장한 뒤부터는 그에게 간추(看秋, 배메기를 할 때, 지주가 소작인의 추수 상황을 살펴보는 일)를 시키고 추수기(秋收記, 추수를 하는 작인(作人)의 이름, 땅의 면적, 곡식의 종류 및 수량 따위를 기록한 장부)를 맡겼는데 추수가 줄었다 하여 책하는 일도 없던 그였다.

“그래. 그렇게 작황이 나쁘더냐. 어디 너 같은 간추인(看秋人)을 두었다간 부자노릇 하겠나.”

하면서도 대견스럽다는 듯이 방긋이 웃는 그였던 것이다.

석와는 이번의 수난이 결코 자신의 실인심(失人心, 남에게 인심을 잃음)에서 온 것이 아니고 생각했고 사실이 또한 그러했다. 만일 인심을 잃어 입은 화라면 담(潭)의 가족들을 그들이 살려 보냈을 리 없지 않은가. 그의 집이 불타고 식구들이 당한 것은 남로당이 민중폭동을 자극하기 위한 대상으로 삼은 데서 입은 파일 뿐이었다.

실상 대구 폭동 사건은 좌우 합작운동의 실패에서 저질러진 공산당의 발악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좌우 합작의 실패는 처음부터 예견된 일이었으나 그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공산당의 파괴 활동이었다. 그 하나가 바로 위폐사건(僞幣事件, 1946년 5월 조선공산당이 당비를 조달할 목적으로 위조지폐를 만들어 시중에 유통시켰다는 죄목으로 기소된 사건)이다.

이 사건은 공산당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계기가 된 사건으로, 이제까지 좌익을 두둔하는 듯하던 미군정 당국까지 태도를 바꾸어 9월 6일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解放日報)에 정간 처분을 내리고, 7일에는 박헌영(朴憲永) 김삼용(金三龍) 이단하(李丹河) 등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공산당의 광란은 여전히 그치지 않고 계속되어 농촌에서는 정부의 양곡 수매에 농민들이 응하지 않도록 선동하고, 도시민에게는 양곡을 내놓으라고 난동을 부리게 하는가 하면, 곳곳에서 파업·폭동·동맹휴학을 일삼케 하던 끝에 마침내 대구를 중심으로 경북 일원에서 대대적인 폭동을 일으켜 관공서를 습격하고 닥치는 대로 살육을 자행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편 10월 28일 북쪽에서 공산당과 신민당이 합당하여 북조선 노동당을 결성하자 남한에서도 북쪽 지령에 따라 공산당·인민당·신민당이 합당하여 11월 23일 남조선 노동당을 결성하기에 이르고, 이런 정세 속에서 군정 당국은 앞서 공포한 조선 과도입법의원(過渡立法議院)의 구성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입법의원들은 관선의원(官選議員) 45명, 민선의원(民選議員) 45명 도합 90명으로 구성케 되었는데, 바로 이 선거에서 목당은 경북지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46년 10월 하순 간접선거로 실시된 민선의원 선거는 각 동·리의 대표 2명씩을 선거하여 이들이 면대표(面代表) 2명을, 그리고 면대표들이 모여서 군대표(郡代表) 2명을 선거하고 이들이 다시 인구할당에 의한 일정 수의 대의원을 선거하는 그런 방법이었다.

경북의 경우 서상일(徐相日) 이활(李活) 이일우(李一雨) 윤홍열(尹洪烈) 김용모(金容模) 강익형(姜益亨)의 5명이 당선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에 의한 입법의원 구성을 이승만(李承晩)과 김구(金九)는 보이코트 하였고 그에 따라 그들은 관선의원서 제외되었다. 서울의 경우는 전서울구(區) 및 갑·을구 각 1명씩으로 도합 3명을 선출했는데 전서울구에서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갑구에서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 을구에서 상산(常山) 김도연(金度演)이 각각 당선되었다.

서울 선거에선 한민당(韓民黨)이 독점하였고 이에 불만을 품은 중간파 김규식(金奎植)이 부정선거라고 주장하자 군정청은 이 주장을 받아들여 재선거를 치른 결과 조소앙(趙素昻) 신익희(申翼熙) 김도연(金度演)이 재선거에서 피선되었다. 인촌을 비롯한 한민당 간부들은 군정청의 주관없는 처사에 실망하여 재출마를 포기하였던 것이다.

목당은 인촌, 설산, 상산과 보조를 맞추었고 경북도 의원 대표로 입법의원에 가담하여 12월 12일 조선입법의원(朝鮮立法議院) 개원식에 참석했다. 의장은 김규식(金奎植)이었다.

그러나 개원은 하였지만 의원직 사퇴, 출석 거부 등으로 정원이 미달되어 재적 3분의 2 이상으로 되어 있던 성원(成員)을 3분의 1로 수정하여 겨우 원(院)을 구성하고 경쟁자가 없는 가운데 김규식이 의장으로 선출되었던 것이다. 이날 목당은 상산과 함께 한국무역협회로 돌아오면서 중간파의 득세가 가져올 앞으로의 정계를 전망하며 적이 걱정됨을 토로했다.

당시 미국무성이나 미군정에서는 이승만 박사와 김구 주석 및 김규식 박사를 장래 한국 정치를 담당할 자격자로 뽑아 3영수(領袖)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승만 박사는 1945년 11월 3일 이래 좌우 합작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실패로 말미암아 그 역량이 박헌영을 따를 수 없다는 평을 받았을 뿐 아니라, 완강한 정치인이라는 평가로 해서 한국 정계에서 제거되리라는 예상을 낳고 있었다.

김구 주석 역시 극렬한 반탁운동 전개로 미국의 신망을 얻지 못하고 있었고, 그리하여 민족자주연맹을 이끌고 있는 중간파의 영수 김규식 박사를 한국 정치계의 영도자로 등용시키려는 것이 미군정의 방침이었다. 이러한 전후 사정을 알고 있는 목당과 상산 두 사람은 중간파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무슨 대책이 있어야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입법의원은 5·10 선거가 실시되어 1948년 5월 19일 해산될 때까지의 겨우 1년 반 동안 존립했을 뿐이며, 그동안의 업적이라면 하살수집법(夏殺收集法), 공창제도(公娼制度) 폐지 등 12건의 법령을 제정한 것이 고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