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현장]사라져 가는 LP에 대한 추억
2016-07-05 18:35
아주경제 한지연 기자 = 어린 시절 가끔 아버지 손에 붙들려 찾았던 회현동 낡은 헌책방 한 켠에는 항상 LP 판들이 어지럽게 쌓여있었다. 중고책 쇼핑시간이 길어질때마다 지루해하는 나를 위해 주인아저씨가 턴테이블에 LP를 재생해주는 모습도 꽤 오래 기억에 남는다. 앨비스프레슬리의 오랜 팬이었던 어머니를 위해 아버지가 저렴하게 구입한 블루하와이 음반도 아직 집 안 찬장에 세워져 있다.
생각해보면 거리에서 LP 상점들을 본 지도 한 참이 지났다. LP의 자리를 카세트 테이프와 CD플레이어, MP3 등이 대체하면서다. 중학교 시절 HOT의 테이프를 늘어지게 듣던 게 엊그제 같은데 초등학교에 다니는 조카들이 이를 낯설어하는 것을 보며 격세지감을 느낄 때도 많다.
최근 현대카드가 만든 '바이닐&플라스틱' 매장을 보면서 와인시장의 악몽이 떠올랐다. 대기업들이 와인문화를 확산시키고 가격 거품을 빼겠다며 뛰어든지 수년만에 중소와인숍들은 모두 사라졌다. 가자세계주류, 피노누아 등 유명 업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장의 다양성도 사라졌다.
죽어가는 LP문화를 확대시키겠다는 현대카드의 취지는 좋다. 그러나 대기업으로서 시장에 미칠 파급력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LP시장은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이 책정되는 매우 유동적인 시장이다. 공급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LP를 취급하는 곳도 꾸준히 줄어드는 추세다. 이제 전국에 50여곳만 남아있다. 워낙 소매업종인데다 이득이 많지 않아 부동산 시세나 주변의 조그만 상권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래서 LP가게 주인들의 대부분은 LP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관심이 있어야 사업을 지속할 수 있다고 말한다. 논란이 일자 현대카드는 중고 LP판매를 중단하고, 할인축소 및 소매점 지원을 위한 다양한 상생 방안을 실천하겠다고 밝혔다. 그나마 다행이다.
대기업의 영세상인 생존권 침해 논란이 비단 이번만은 아니다. 앞서 호텔신라와 신세계그룹도 빵집, 수퍼마켓 사업을 추진했다가 골목상권을 침해한다는 논란이 일자 사업을 철수했다. 자금력과 좋은 인재풀을 갖춘 기업들이 왜 그 능력을 해외기업들과 경쟁할 콘텐츠를 기획하는데 온전하게 쏟지 못하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숲은 몇몇의 커다란 나무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숲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안에 꽃도 있고, 잡초도 있고 이름 없는 작은 나무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건강한 숲들이 모여 지속가능한 생태계를 이룬다. 이것이 우리가 시장 한 편의 작고, 보잘것 없는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