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교의 세상보기] 한국과 대만이 직면한 공통의 고민
2016-05-26 11:37
대만 국기가 서서히 국기 게양대에서 내려지자 대다수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일부는 한국에 대한 배신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같은 날 중국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 이상옥 당시 외무장관과 첸치천(錢其琛) 중국 외교부장이 한중 수교 공동성명에 서명했다. 대만은 하루 전인 23일 한국과의 단교를 선언했다.
국민당을 이끌었던 장제스(蔣介石) 총통은 1949년 1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한국을 정식 승인했다. 미국 다음이었다. 같은해 8월, 대한민국을 찾은 최초의 국빈도 장제스였다. 중국 땅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그가 지원했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6·25전쟁 때는 특수전 요원을 비밀 파병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뒤인 1953년 11월, 타이베이로 날아가 고마움을 전했다. 대만인들은 단교 전까지 한국을 같은 반공 분단국인 혈맹으로 생각하는 편이었다.
"한국까지 이럴 수가?" 당시 대만은 한국이 중국과 손을 잡는 과정에서 자신을 헌신짝 취급한다고 느꼈다. 적절하게 양해를 구하는 절차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태극기를 불태우고 한국 상품 불매운동을 벌이고···. 대만인들이 격한 반응을 보인 건 중국의 부상에 따라 국제적으로 고립됐던 처지도 한몫했다. 유엔이 베이징 공산당 정부를 유일한 중국으로 인정한 건 1971년이었다. 그들은 주요 외교상대국이었던 한국마저 등을 돌리는 현실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그로부터 24년, 양국은 그야말로 애증의 세월을 보냈다. 한 동안 서로를 경쟁 상대로만 의식하기도 했다. 이제 두 나라 관계에 있어서 변화 가능성이 움트고 있긴 하다. 지난 20일 출범한 차이잉원(蔡英文) 정부는 한국과 새로운 관계 설정에 나서고 싶어 한다. 마잉주(馬英九)의 국민당 정부가 중국만 바라보다 늪에 빠뜨린 경제를 구하기 위해서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차이잉원은 취임사에서 새 정부의 첫째 과제로 '대만 경제구조 재편'을 꼽았다. 대만 경제발전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그 수단으로 경제 활력과 자주성 회복, 다자간·양자간 경제협력 강화, 신남향정책(新南向政策) 등을 제시했다. 각각 차이는 있지만 중국 의존 일변도에서 벗어나겠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를 위해선 특히 자유무역협정(FTA) 확대가 절실한 과제다. FTA 선진국인 한국으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높은 경제 의존도는 우리에게도 '양날의 칼'이다. 그런 면에서 신남향정책은 주목할 만하다. 우리가 대만에게 FTA 관련 도움을 주고 동남아시장 진출에 있어서 대만과 공조할 수 있다면 상생 모델이 될 수 있다. 지난해 대만은 한국의 8대 수출국이자 6대 수입국이었다. 더욱이 대만은 우리에게 독일보다 2배나 큰 수출시장이다. 양국이 상호 보완적 관계에 있다는 증거다.
관건은 우리 정부의 태도다. 정부는 차이잉원 총통 취임식에 별도 대표단을 보내지 않았다. 한국·대만 의원친선협회 회장인 조경태 의원 일행이 참석했을 뿐이다. 차이잉원이 지난 1월 선거에서 당선됐을 때도 청와대는 축전을 보내지 않았다. 단교 뒤 전례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대만은 2013년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에 왕진핑(王金平) 입법원장을 단장으로 한 여야 의원 6명의 사절단을 파견했었다.
중국을 의식한 결과다. 우리는 그 동안 대만과의 관계에서 지나치게 중국 눈치를 봐왔다. 하지만 이러한 방향이 중국 앞에서 소국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지속적인 생존논리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강대국의 심기만 살펴서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중국을 자극하지 않고 경제 분야에서 대만과 협력하는 것마저 포기한다면? 독립국가의 자존심까지 버리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대만 신정부 출범은 좋은 계기다. 바야흐로 대만 정책을 재검토할 분위기는 성숙됐다. 양국 사이에 정식 국교는 없지만 서로 '윈·윈'할 수 있는 여지는 적지 않다. 박 대통령과 차이 총통에게는 미혼의 여성 국가원수라는 공통점도 있다. 새로운 미래를 위해 힘을 합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나라에 주어졌다.
(아주경제 중문판 총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