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계춘할망’ 윤여정, 우아한 직구
2016-05-11 16:59
5월 19일 개봉하는 영화 ‘계춘할망’(감독 창·제작 ㈜지오엔터테인먼트· 공동제작 (주)퍼플캣츠필름 (주)빅스토리픽쳐스·제공 미시간벤처캐피탈㈜)는 2년의 과거를 숨긴 채 집으로 돌아온 수상한 손녀 혜지와 오매불망 손녀바보 계춘 할망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줄거리를 늘어놓아도 어딘지 낯설다. 순박한 제주도 해녀, 손녀 바보 윤여정이라니. 도회적이고 센 캐릭터들을 줄곧 맡아왔던 윤여정이 시골 할머니 역할을 맡는다기에 이상스레 낯설다고 여기던 참이었다. 스스로도 “이렇게 늙은 역할은 처음”이라던 윤여정은 새로운 얼굴을, 도전을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작품을 할 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써요. ‘계춘할망’ 역시 그런 부분에서 출연을 결정지었겠죠. 처음에 제작자가 전화했길래 ‘나는 도회적인 이미지인데 왜 이걸 캐스팅하냐’고 했더니, 그 양반이 그러더라고. ‘아, 도회적인 이미지 이제 소멸하셨습니다’라고. 하하하. 그래서 한 번 해볼까 했던 거야. 특별한 의미 보다는 똑같은 역할이 싫고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다른 배우들도 다 그렇듯 말이에요.”
“힘들었어요. 해녀복을 입다가 귓바퀴가 찢어지고 뱀장어에 물리기까지 하고. 뱀장어가 사타구니를 꽉 물어서 아직까지도 상처가 있어요. 독은 없다는데 까맣게 흔적이 남더라고. 제때 항생제를 맞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 같아요. 그걸 보면 아직까지도 화가 울컥울컥한다니까.”
촬영장의 최고참 윤여정은 스태프와 감독을 이끌며 강도 높은 촬영을 소화했다. “시간이 곧 돈”인 영화 촬영인 만큼 “이따금 윽박지르기도 하고 혼내기도 하면”서. “빨리 제주도를 떠나고 싶어서” 일주일에 5일 동안 촬영에 매진하기도 했던 그는 고된 일정 속, 친구들의 방문을 유일한 낙으로 삼기도 했다.
푸석푸석한 백발에 새카맣게 탄 얼굴, 군데군데 피어난 검버섯을 가진 계춘은 우리가 아는 보통의 할머니면서 동시에 우리에게는 낯선 윤여정의 얼굴이었다. 특히 그를 더욱 친근하고 가깝게 느낄 수 있게 한 것은 푸근한 사투리였다.
“처음에 제작사에서 사투리 선생님을 모셔왔어요. 그런데 무슨 소린지 한마디도 못알아 듣겠는 거예요. 그냥 뉘앙스만 줘도 되는데 교수님처럼 강의하듯 하니까. 잘못하면 영화에 자막 나가야 할 판이야. 그래서 감독님한테 사투리는 무시하고 가자고 했죠. 그래도 해녀인데 사투리를 안 쓰는 건 이상하니까 어미만 살리자고요. 다행히 촬영장 근처에 카페가 하나 있었는데 거기 사장님이 알아들을 수 있는 사투리를 쓰더라고요. 그분을 선생님 삼아서 많이 배웠죠.”
내리사랑을 실천하는 계춘의 면면들. 윤여정은 극 중 계춘의 모습을 보면서 증조할머니와 자신을 떠올리곤 했다고 털어놨다.
“증조할머니에 대한 죄송스러움이 있어요. 할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저는 증조할머니와 더 가까웠거든요. 내리사랑이라는데 손주가 낳은 딸이 얼마나 예뻤겠어요. 벌써 50년 전 얘기야. 할머니가 얼마나 예쁘면 먹는 것도 씹어 입에 넣어주고 그랬을까요. 정말 최고의 사랑인데 그 당시에는 질색하곤 했죠. 지나고 보니, 내가 나이를 먹고 보니 그래. 정말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죠. 그래서 영화를 찍으면서 힘들 때마다 증조할머니를 생각했어요. ‘할머니께 바치는 영화라고 생각하자’고 주문을 외웠죠.”
윤여정의 삶 속에 녹아있는 할머니의 기억들. 그는 “어떤 장면에서 연상 작용으로 할머니의 모습”을 꺼내 올렸다. 그의 사소하고 친근한 연기는 “삶이 소화돼 불쑥 나온” 결과물이었다.
“그래서 난 혜지에게도 공감이 됐어. 할머니가 낯설고 불편하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의 과거의 모습도 떠오르고 그걸 바라보는 증조할머니의 마음도. 혜지를 연기한 고은이는 신선한 면이 있어서 그런 감정을 나눌 수 있었어요.”
모든 대답은 이유가 분명했다. 노련한 그의 삶처럼, 명확하고 간결한 답변에서 그의 연륜을 엿볼 수 있었다. 그에게 “여배우의 삶”에 관해 물을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여배우의 삶이 힘들다고들 하죠. 그게 40대쯤 주인공에서 밀리면서부터 끔찍해져서일 거야. 하지만 나는 그 시기가 배우의 삶이 아닌 내 인생 자체에서 가장 끔찍한 시기였기 때문에 배우로서 힘들고 괴롭지는 않았어요. 연기는 곧 일이니까. 그저 일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 감사했죠. 그리고 60대를 넘기면서는 내가 좋아하는 감독, 작가와 일하며 여유롭게 지내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게 내겐 가장 큰 사치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