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 '악성재고' 임계점…디플레·고용악화 부른다
2016-02-17 08:41
아주경제 양성모·노승길 기자 = 기업들이 생산은 했으나 팔지 못하고 쌓아둔 재고가 한국 경제의 '뇌관'으로 떠오르고 있다.
각종 대내외 리스크로 휘청이는 한국경제가 '악성 재고'에 따른 부작용으로 카운터 펀치를 맞을 수 있다는 우려다.
재고가 쌓이면 기업들은 생산을 줄이게 되고 이에 따른 투자 위축과 고용 감소로 경기 회복은 더욱 둔화될 수밖에 없다.
또한 임계점에 달한 재고 물량이 저가로 시장에 풀릴 경우 지난해부터 제기된 디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질 수 있다.
재고율 상승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 기업들이 앞으로 경기가 회복될 것으로 보고 미리 생산을 늘리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뼈아픈 것은 지난해 재고율이 가파르게 상승한 이유가 수요 부진에 따른 '악성 재고'라는 점이다.
◆ "팔리질 않는다"… 글로벌 경기 위축에 국내 대기업들 재고자산 '눈덩이'
우리나라 최대 수출국인 중국의 경기 둔화와 엔저로 인한 가격경쟁력 저하 등으로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재고자산이 치솟고 있다.
16일 산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현대차, SK하이닉스 등 국내 대표 수출기업들의 재고자산이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우선 삼성전자는 올 3분기 기준 재고자산은 22조8410억원을 기록해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관련업계에서는 중국의 경기둔화와 중국 내 로컬기업들의 성장 등으로 IM(IT·모바일)부문의 재고비율이 가장 높을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또 SK하이닉스의 3분기 기준 재고자산은 D램과 낸드플래시의 수요 부진과 공급 과잉 등 영향으로 1조8265억원에 달해 전년 동기 대비 3000억원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자동차부문은 심각한 수준이다. 현대자동차의 3분기 기준 재고자산은 9조6980억원으로 2014년 12월말 7조4172억원에 비해 2조2000억원이 급증했으며 기아자동차도 2014년 말 6조805억에서 3분기 말 7조4873억원으로 23.13%가 급증했다.
이 역시도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들의 경기둔화로 수요가 크게 줄어든 데다 신차 출시를 앞두고 재고물량 크게 쌓인 점 등이 이유다.
◆ "이번 고비만 넘기자"…버티기식 좀비기업이 재고 늘려
제조업 재고가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이유는 글로벌 수요가 줄었음에도 좀비기업이 버티기식 생산에 매달리고 있는 점도 원인이다.
윤우진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시장 원리만 놓고 보면 정리돼야 할 철강·석유화학 기업들이 저금리, 정책금융 지원 등으로 연명하면서 제품이 안 팔려도 꾸준히 생산해 재고를 늘린 결과"라고 지적했다.
기업들이 "이번 고비만 넘기면 회생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수요가 없어도 재고를 늘리고 있다는 의미다.
실제로 철강업 중 대표적 생산품인 합금철의 재고량은 2009년 1만8000메가톤에서 지난해 9월 14만5000메가톤으로 8배나 급증했다.
강관 재고량도 같은 기간 21만1,000메가톤에서 28만5,000메가톤으로 7만4,000메가톤(35%) 늘었다.
석유화학의 기초 제품인 에틸렌도 같은 기간 4만1000메가톤에서 6만5000메가톤으로 1.6배 불어났다.
◆ 재고 증가로 일자리 감소·디플레 우려까지
제조업의 재고 증가는 기업의 생산감소로 이어진다. 기업이 생산을 줄인다는 의미는 일자리 창출 여력이 떨어진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우리나라의 일자리 창출은 여전히 제조업 등 전통산업과 간접고용이 주도하고 있는 상황이다.
기업이 수요 부진에 따른 악성 재고가 늘어나면 생산 감소→투자 위축·고용 감소로 이어진다.
해외 투자은행(IB)들은 재고율 증가 등을 이유로 올해 한국의 제조업 일자리 확대는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바클레이즈는 "내년 노동시장은 내수 및 서비스업 안정 등에도 불구 대외수요 부진에 따른 생산 감소, 재고 조정 지연 등으로 제조업 고용 확대가 제약될 것"으로 전망했다.
지난해 11월 제조업 일자리가 감소세로 전환된 가운데 앞으로도 수요 부진에 따른 재고 증가로 제조업 고용감소가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바클레이즈는 "대기업들이 해외로 생산기지를 이전하면서 재고율이 높은 중소형 제조업체의 고용상황은 더 악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한 기업들이 무리하게 재고처리에 나설 경우 디플레이션 우려를 키울 수도 있다.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개월 만에 0%대로 주저앉았다. 특히 농산품 및 석유류를 제외한 근원물가 상승률도 13개월 만에 1%대로 떨어졌다.
민간경제연구소 관계자는 "재고 증가로 기업이 생산을 늘리기 보다는 재고부터 소진해야 하기 때문에 성장 동력이 약화될 수 있다"라며 "기업들이 재고소진을 위해 저가로 제품을 시장에 내놓을 경우 디플레이션 우려를 기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