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人100言]이원만 “상지상(上之上)의 사업을 해야 한다”

2016-01-20 13:17
한국경제의 기적을 이끌어낸 기업인들의 ‘이 한마디’ (14)

오운 이원만 코오롱그룹 창업자[사진=코오롱그룹 제공]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나는 동포에게 의복을 주자고 결심했다. 헐하고 질긴 의복을 입히고, 부녀자를 빨래의 고통에서 해방시키고, 부녀자의 양말 뒤꿈치를 꿰매는 고역의 생애를 그렇게 하지 않고 편하게 살 수 있는 생애로 전환시키려고 했다."

1963년 국내 최초의 나일론 원사공장 준공식에서 오운(五雲) 이원만 코오롱 창업자는 이 같이 말하며 "나는 오늘 한국에서 처음으로 나일론 원사를 생산했다.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 그대로 인간생활에서는 의복이 날개다. 우리 민족도 잘 입고 떳떳이 밖으로 나가 세계의 다른 민족과 경쟁해 이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한민국 섬유산업의 성장은 나일론의 자력생산에서 비롯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오운은 서른 살이 되기 직전인 1933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배짱이 두둑하고 아이디어가 넘쳤던 그는 2년만에 아사히공예주식회사를 세워 광고 문구를 천에 인쇄한 작업 모자를 생산해 대성공을 거뒀다. 또 일본에서 입지가 약한 재일 동포를 위해 경제동우회를 설립, 사업하는 동포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그러던 중 오운은 꿈의 섬유 ‘나일론’을 접하게 됐다. 나일론은 강철처럼 질기고 윤기 있으면서 벌레도 먹지 않는 ‘기적의 섬유’로 불렸다.

한국 전쟁이 끝난 뒤 조국으로 돌아온 그는 아들 우정(牛汀) 이동찬을 통해 1954년 개명상사를 설립, 나일론을 수입 판매했다.

사업이 커지자 오운은 나일론을 직접 생산하기로 결심했다. 1957년 한국나이롱주식회사(현 코오롱인더스트리)를 설립해 공장을 세우고, 1963년 국내 최초로 나일론사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그는 섬유산업을 수출산업으로 만들기 위해 저렴한 가격에 원사를 확보하는 일이 필수라고 생각했다. 폴리에스터 원사 생산에 돌입, 이를 기반으로 1973년 타이어코드 사업에 진출했다. 1970년대 코오롱 상사를 통해 코오롱 스포츠 브랜드를 출시했다.

오운은 제6~7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기업가 정신을 정치에 접목시켜 ‘수출 대한민국’을 향한 열정을 보였다.

농공병진(農工竝進, 농업과 공업이 함께 발전)을 주장한 그는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을 설득해 서울 구로동 수출산업공업단지 건설을 이끌어 냈다. 1967년 완공된 수출산업공업단지는 섬유류, 플라스틱, 피혁, 전자기기, 소공구 등 제조업체가 대거 입주해 한국 수출의 전초기지 역할을 수행했다.

오운의 다양한 아이디어는 현실화 된 것들이 많은데, 나무 전봇대가 시멘트 전봇대로 바뀌었고, 가정과 업소마다 프로판가스가 도입됐다.

오운의 경영철학은 ‘수평론(水平論)’으로 축약된다. 수평선 위는 ‘상(上)’이요 아래는 ‘하(下)’인데, ‘상’에는 ‘상지상(上之上)’이 있고 ‘상지하(上之下)’가 있으며 ‘하’ 역시 등급으로 분류할 수 있다.

국가와 개인에게 모두 이익이 되는 사업은 ‘상지상’이고, 반대로 국가와 개인 모두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하지하’이다.

그는 늘 “제대로 된 기업가라면 ‘상지상’으로 국가와 개인에게 모두 이익이 되는 사업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나일론을 처음으로 소개하고 수출산업을 부흥시키고자 노력한 것은 이러한 ‘상지상’ 경영철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