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열 칼럼] 고추장 같은 한국경제
2016-01-06 11:04
김동열(현대경제연구원 정책조사실장)
고추장의 첫 번째 맛은 자연이다. 고추장의 원료는 고추, 찹쌀, 엿기름, 조청, 메주가루 등이지만 더 중요한 원료는 햇빛과 바람과 물과 불 같은 자연이다.
봄과 여름의 비와 바람, 햇볕과 천둥을 거쳐 빨간 고추가 만들어진다. 찹쌀이나 엿기름, 조청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마찬가지로 자연의 맛이 스며들어 간다.
메주가루를 만들기 위해서는 콩을 삶아서 메주를 만들어 햇볕과 바람을 들이고 곰팡이를 띄우고 물에 씻어서 말리고 절구통에 찧어져야 하며 그런 긴 과정 속에서 자연의 맛이 스며들어간다.
고추장의 두번째 맛은 시간이다. 고춧가루와 메주가루를 만드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하지만, 고추장을 만드는 것도 여러가지 절차와 시간이 필요하다. 또 고추장을 만들어 놓고도 바로 먹지 않는다. 고추장 독에서 다시 발효되고 숙성되는 6개월여의 시간이 흘러야 깊은 맛이 난다.
고추장의 세번째 맛은 정성이다. 정성이 없다면 고추장을 만들 수가 없다. 한 여름 뙤약볕에서 고추를 따는 것부터 얼마나 고단한 일인가? 메주를 만들고 처마에 매달아 곰팡이를 띄우는 것 역시 얼마나 귀찮은 일인가? 찹쌀 풀을 만들고, 엿기름가루를 만들어 찹쌀 풀에 섞고, 고춧가루와 소금을 넣어 적당하게 간을 맞추는 일도 손이 많이 가는 과정이다.
우리 고유의 맛과 냄새가 스며있는 고추장처럼 오랜 기간 숙성돼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경제 체질을 갖춘 한국경제를 만들어 가야 한다. 그래서 안팎의 불안과 변수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고, 큰 바위처럼 자리를 굳건히 지켜낼 수 있는 그런 경제를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한다.
2016년 새해가 시작됐다. 병신년은 붉은 원숭이의 해라고 한다. 건강하고 재주가 많다고 알려진 붉은 원숭이의 해에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들은 예로부터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올해도 건강하고 기쁜 소식이 많은 1년이 됐으면 좋겠다. 신년 벽두부터 상하이 증시가 폭락하는 등 좋은 소식으로 시작하진 않았다. 사우디가 이란에게 단교를 선언하면서 중동 정세가 다시 불안해져 미국이 중재에 나섰다.
우리 증시는 다른 나라와 달리 하락폭도 크지 않고, 금새 안정을 되찾는 분위기라서 다행이다.
한국경제는 수출입으로 먹고 사는 나라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경상수지가 1000억 달러 흑자를 기록하는 등 역대 최고의 실적을 올렸다.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수출도 줄고 수입은 더 크게 줄어 생긴 불황형 흑자여서 뒷끝이 개운치 않다. 소비와 투자 등 내수가 계속 부진하고, 일자리도 많이 생겨나지 않는 등 체감경기는 썰렁한 편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이 최근 일반인 80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올해가 내년보다 더 어렵다는 응답자가 절반을 넘었다. 조선, 철강, 화학 등 전통적인 주력산업이 부진하고 그나마 경기가 좋았던 전자, 반도체, 자동차도 앞날이 밝지 않다. 중국과 일본의 틈새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되었다는 비관적인 분석도 잇따르고 있다.
그럴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제품과 서비스의 국제경쟁력을 높이는 일이다. 중소기업의 기술력이 튼튼히 뒷받침해 하체가 튼튼한 경제구조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일자리가 생기고, 소득을 높여 가계의 가처분소득이 늘어나는 한편, 소비도 자연스레 늘어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기본기를 충실히 갖추는 일은 자연과 바람과 정성이 들어간 고추장을 만드는 것처럼 어렵다. 시간과 정성이 요구된다. 우수한 인적 자원과 기술과 자본이 투입돼야 한다.
이제 압축성장의 신화는 끝났다. 선진국 따라하기도 끝났다. 우리 고유의 자연과 손맛을 집어넣어 오랫동안 발효와 숙성을 통해 만들어내는 고추장 같은 한국경제가 필요한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