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왕국의 집념’ 장경호 동국제강 창업주 40주기, 가족행사로 조용히

2015-09-08 15:41

장경호 동국제강 회장이 생전 "국가와 사회에서 얻은 이익은 다시 사회의 공약을 위한 일에 환원해야 한다"며 사재 환원을 선언하고 있다.[[사진=동국제강 제공]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철강은 모든 산업의 기초이며 골격으로서 철강업의 발달 없이는 산업발달이나 경제개발을 기대할 수 없다. 이러한 철강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모든 사업적 정열을 불태워 온 철강입국, 산업보국에의 정신은 세대교체 후에도 설립이나 인수도 철강관련 업체만 하고 바늘에서 철강소재까지 철이라면 무엇이던 하겠다는 철강왕국에의 집념을 불태워 왔다.”

동국제강 창업주인 대원 장경호 회장은 생전 철강산업을 일으킨 배경과 성공해야만 했던 이유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9일은 장 회장이 세상을 떠난 지 40년이 된다. 별세 직전 전 재산 30억6300만원(현 시세 4000억원 상당)을 국가에 헌납하며 비움의 리더십을 실천한 그는 평생을 근검, 절약을 생활신조로 살아온 성실한 기업인이었다.

1899년 부산에서 태어난 장 회장은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 서울에서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후 떠난 일본 유학생활 중 선진문물을 접한 뒤 학업보다 국가와 국민을 살릴 수 있는 사업이 먼저라는 신념을 갖고 중도 귀국했다. 고향인 부산에서 선친이 경영하던 해산물과 농산물 도매업에 손을 대 돈을 번 그는 1929년 대궁양행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기업가의 길에 들어선 뒤 1935년 남선물산 설립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1949년, 장 회장은 운명처럼 철강과 첫 인연을 맺는다. 재일동포가 보유하고 있던 신선기(철사를 뽑아내는 기계)를 인수해 조선선재공업을 설립한 것이다. 6.25 전쟁 기간 중 철사와 못을 생산해 큰 돈을 번 장 회장은 이를 1954년 7월 현 동국제강을 설립했다.

동국제강 설립 전 그는 ‘앞으로의 사업은 자손들도 긍지를 갖고 이어받을 수 있는 사업, 국가경제에 기여할 수 있는 애국사업을 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대상이 바로 철강산업이었다.

동국제강의 설립으로 한국철강산업의 역사는 현대적 민간 철강산업 시대를 맞이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경영의 선이 굵고, 한 번 결정하면 후회하지 않으며 목표를 쟁취해내는 집념이 강했던 장 회장은 1962년 부산 용호동 일대 바다 매립공사를 통해 공장을 세우는 당시로서는 큰 공사를 시작했다. 재계에서는 무모한 도전이라고 부정적인 시각을 보냈고, 심지어 “동국제강이 곧 망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하지만 장 회장은 부산 공장 건설현장을 방문한 아들들에게 “사람가는 길은 천 번 물이 꺾이는 것과 같다고 했다. 꺾이지 말고 단숨에 가는 길이란 의미가 없다. 가다가 혹 꺾인다 하더라도 좌절하지 말라. 한쪽 길이 막히면 다른 한쪽으로 길이 열리는 게 세상사 이치다”며 할 수있다는 확신을 심어줬다. 장 회장은 용호동 공장을 완공했고, 1964년 8월 21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공장을 방문해 장 회장을 비롯한 회사 관계자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장 회장의 또 다른 가르침은 ‘사원을 가족같이 아끼라’는 것이었다. 생전 그는 “회사에 앞서 가정부터 지키라”는 말을 자주 해왔고 그 스스로 앞장서 이 계명을 지켜왔다. 현재 동국제강 노사는 20년째 항구적 무파업을 실천하며, 국내 산업계의 노사화합의 상징으로 인정받고 있다.

올해 40주기를 맞지만 동국제강은 별다른 행사 없이 조용히 지내고 있다. 허례허식을 싫어했던 창업주의 뜻이 반영된 것으로, 그룹 임직원들의 참석은 배제한 채 가족들만 모여 조용히 법회를 갖는 것으로 알려졌다.

장 회장은 기업가의 길과 함께 평생 불교에 정진해 ‘살아있는 유마거사’로 불리기도 했다. 그가 국가에 헌납한 사재로 설립한 대한불교진흥원도 별다른 행사는 열지 않는다. 불교진흥원은 대신 장 회장의 뜻에 따라 ‘세상을 위한 불교’라는 기치 하에 불교를 현대적으로 재조명하고, 21세기 현대사회에 적합한 새로운 포교방법을 창출·장려하기 위해 제정한 ‘대원상’을 올해로 13회째 진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