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와 무역]극심한 밀수 “나만 잘 살면 되지” 풍조 만연

2015-06-25 03:20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6.25전쟁은 온갖 재산을 불태웠으며 고철과 탄피만을 남겼다. 그나마 국민들의 삶에 도움이 될 물건은 미국이 가져다주는 구호품 얼마와 의약품이 전부였다.

생활주변 물자가 궁핍하다보니 다시 다시금 밀수가 극성을 부렸다.

부산, 마산(현 창원) 등지로 밀려 내려온 피난민중 실업자 수는 300만명을 넘었고, 여기에 16개국이 참전한 유엔군의 관리 하에 있는 기관들은 우리나라 관리 밖에 놓여 있는 치외법권적인 기관들이었다. 미군 PX, 군수송선, 항공기 등이 어떤 물자를 실어 나르던 간에 우리 정부는 이에 관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형편이고 보니 밀수가 있고, 밀수 외래품이 범람한들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세관은 조직원 부족과 빈약한 장비로 이 엄청난 밀수를 막을 길이 없었고, 이로서 밀수 극성 시대가 도래했다.

그중에서도 해방 후 잠시 중지됐던 일본으로부터의 밀수가 다시금 극성을 부렸다. 일본인들은 두 번 없는 폐품처리시장의 문이 열리자 관민이 의기투합하여 밀수를 공공연히 장려했다.

특히 오사카는 대한 밀수의 본원지이었으며, 대마도는 그 전진기지였다. 오사카의 고철과 진유 시세는 밀수품이 싣고 들어오는 양에 좌우됐다. 진유 시세는 엔화로 t당 35만엔에서 40만엔을 상회했다. 한국 내 시세는 10만엔 정도였으니 일단 네 배 가까운 이윤이 보장됐다.

어선을 가장한 밀수선이 진유를 싣고 오사카항구 밖에 도착하면 짐을 바다 속에 집어넣고는 지점을 표시해 일본인이 찾을 수 있도록 했다. 업자는 오사카항으로 들어가서 거래를 끝냈다.

돌아오는 길에 사들이는 밀수품은 사치품들로 거간꾼들에게 돈만 주면 주단포목, 화장품, 브로치 등 원하는 물건을 전부 구입할 수 있었으며, 일본인들은 이를 대마도까지 수송해 주는 것은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배도 마련해 줬다.

밀수품을 실은 밀수꾼들은 대마도로 가서 조그만 어선에 올라타고 어장으로 나가는 시늉을 하다가 돛을 올리고 부산의 기장을 향해 직선으로 달렸다. 바람만 잘 만나면 배는 쏜살같이 바닷물을 헤치면서 불과 5~6시간 안에 부산 기장까지 도착한다.

도착 시간은 한밤중인 새벽 3시경으로 잡아야 하기 때문에 대마도에서 돛을 올리는 시각은 보통 저녁 9시경이었다. 일본에서 네 배의 장사를 하고 돌아온 밀수꾼들은 싣고 들어온 밀수품을 다시 국내에서 보통 20배의 장사를 했다.

밀수의 대상은 버려진 고철만 주워서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공장시설을 이전한다고 기계를 뜯어 실은 배가 인천을 떠나 일본으로 직행했다는 이야기도 들렸고, 부산부두의 무역업자 창고에서는 진유 인고트가 가공제조 됐으나 밀수로 적발됐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알지만 모르는 척 해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일본의 한 지방신문은 ‘고선 끌고 고베입항’이란 제목의 기사를 통해 한국의 고철 밀수출 행태를 보도했다. 그러나 그 뒤 일본 정부가 이를 문제 삼았다는 후속기사는 없었다고 한다.

6.25동란으로 특수경기를 맞은 일본은 시내에 백화점, 호텔, 빌딩을 건설해 나갔다. 당연히 이들 건물을 장식하는 섀시와 도어 핸들, 황홀한 전등 장식품에는 우리나라에서 밀수된 진유 인고트가 사용됐다.

일본으로 밀수출된 고철은 현지에서 재생과정을 통해 미군의 군수품으로 한국에 재수출 됐으며, 이렇게 번 돈으로 일본 경제는 활력을 찾을 수 있었다.

반면 밀수를 통해 우리가 들여온 것은 일부 부자들만이 구입이 가능한 의료품, 화장품 등 신변 장식품과 사치품이 대부분이었다.

전쟁이 가져다 준 선물은 무서운 해독뿐이었다. 사회의 인심은 거칠 대로 거칠어졌고. 나 하나밖에 모르는 이기의 화신들이 날뛰는 세상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