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기획] "이산가족에게 시간이 없다"…생존자 대부분 80·90대
2015-06-24 00:59
전쟁 이후 첫 이산가족 상봉의 감격은 TV를 통해 생중계되면서 전 국민을 눈물바다에 빠뜨렸다. 최근 개봉한 영화 '국제시장'에서도 이 장면이 재연돼 다시 많은 국민들이 눈물을 훔쳤다.
1985년 첫 이산사족 상봉을 시작으로 2014년 2월 20∼25일까지 이산가족 상봉은 모두 19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만남 장소는 금강산 일대가 주를 이뤘다.
이산가족 상봉은 14년간 부정기적으로 진행돼 오면서 한반도 긴장 완화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5년 8월에 시작된 이산가족 화상 상봉도 2007년 11월까지 7차례나 진행됐다. 그러나 최근의 경색된 남북관계로 인해 이산가족 상봉이 진척되지 않고 있다.
◆ 이산가족 상봉행사의 중단 길어져
분단이후 첫 이산가족 상봉은 40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다. 1985년 9월 20일 남북 예술단 교류 및 이산가족 상봉 시범 사업이 출발점이었다. 사전 생사확인 작업 없이 고향 방문을 목적으로 진행한 사업이라 실제로 이산가족 상봉 성사는 절반을 조금 넘은 수준에 그쳤다.
당시 평양이 고향인 이산가족 50명 가운데 35명, 서울을 방문한 북측 이산가족 50명 중 30명이 가족을 만났다.
이후 이산가족의 신청과 사전 조사를 거쳐 진행된 본격적인 이산가족 상봉은 2000년 8월 15일 제1차 대면상봉 행사를 통해 처음 성사됐다.
이후 2007년까지 매년 많으면 세 차례, 적어도 연간 한 차례씩은 상봉행사가 열렸지만 한 번에 만날 수 있는 인원은 800∼1200여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산가족 상봉은 남북관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순탄치 않은 길을 걸어야 했다.
2008년 남북관계 경색으로 한 해를 걸렀고 2009년, 2010년엔 한 차례씩 열린 이후 2014년 2월 20일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상봉 행사가 열리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19차례에 걸쳐 열린 대면 상봉으로 가족을 만난 이산가족은 총 3934가족, 1만1799명이다.
이 가운데 남측 인원은 1만2297명으로 전체 이산가족 수의 10% 수준이다.
직접 만나지는 못해도 화상통화를 하는 화상상봉이 2005년 8월 15일부터 시작됐지만 2007년 11월 14일 제7차 상봉을 끝으로 진척이 없는 상황이다.
이외에도 남측 가족의 모습을 담은 영상편지는 지난해까지 총 8044편이 제작됐지만 실제로 북쪽 가족에게 전달된 것은 20편에 불과하다. 일반 편지의 경우 2001년 3월 남북에서 각각 300명씩 교환되는 것에 불과했다.
◆ 이산가족 생존자 대부분 80·90대
6·25전쟁 때 가족과 헤어지고 지금까지 떨어져 사는 이산가족은 지난달 말 기준으로 남한에만 총 12만9688명이다. 이산가족 중 절반가량이 이미 숨져 생존자는 6만6843명에 불과하며 대부분이 80·90대 고령층이다.
이 때문에 이산가족 중에서도 북한에 남은 가족이 아직 살아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접은 이가 상당수인 것으로 알려진다.
황해도 해주가 고향인 김인명(90) 할아버지는 "나도 이제 아흔이니 부모님은 이미 다 돌아가셨을 것"이라면서 "산소 위치라도 가르쳐주면 찾아가고 싶다"고 했다.
65년전 마을 치안대에서 근무했던 26살의 청년은 인민군을 피해 나이에 아내와 헤어져 이틀간 숨어있던 것이 65년을 훌쩍 보낸 백발의 노인이 됐어도 가족들을 만날 수 없다.
최근 5년간 이산가족의 생존자 통계를 살펴보면 매년 3000명 가량 줄어들고 있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내년이면 전체 이산가족 가운데 사망자의 수가 생존자 수를 넘어서게 된다.
이산가족 사망자가 계속 늘어남에 따라 대한적십자사는 생존자들을 상대로 유전정보 보관 사업에 나섰다. 이산가족 사후에라도 북한에 있는 가족과 혈연관계가 맞는지 확인할 수 있게 하려는 조치다. 대한적십자사에 현재까지 유전정보 보관을 신청한 이산가족은 2만1914명이다.
죽어서라도 전쟁으로 헤어진 가족을 만나고 싶어하는 이산가족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는 남북은 정치색에 휘둘리지 않는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를 하루속히 재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