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도시를 읽다(32)] 마오쩌둥이 육성한 공업기지 '천년古都' 뤄양
2015-01-14 07:00
뤄양이라는 이름은 도시가 황허(黃河)의 지류인 뤄허(洛河)의 북쪽에 위치한 데에서 유래했다.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볕 양(陽)’이 들어간 지명은 강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는 뜻이다.
중국 혁명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은 뤄양이 ‘떨어지는 해’를 뜻하는 ‘냑양(落陽)’과 발음이 동일하다는 이유로 기피했다. 그는 살아생전 단 한번도 뤄양을 방문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반면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인 당나라 측천무후는 뤄양을 신도(神都·신의 도시)라 칭하고 당나라 수도를 장안에서 뤄양으로 옮겼다. 그는 남은 생을 이곳에서 보냈을 정도였다.
예로부터 중국인들은 허난(河南)성 일대를 중국의 중심, 중원(中原)으로 여겼다. 그리고 그 중심에 뤄양이 있었다. 뤄양은 서역으로 연결된 비단길과 수당 시대 남북을 연결하도록 건설된 대운하가 교차하는 곳이다. 뤄양은 지리적 요충지로 대륙 영웅호걸들이 중원을 재패하기 위해 반드시 차지해야만 하는 병가필쟁(兵家必爭)의 땅이었다.
주(周)나라, 한(漢)나라, 위(魏), 서진(西晉), 북위(北魏), 수(隨), 당(唐), 후량(後梁), 후당(後唐) 등 9개 왕조가 1000여년의 세월에 거쳐 도읍으로 삼았다. 뤄양이 오늘날 ‘구조고도(九朝古都)’라 불리는 이유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삼국지' 이야기 주무대 역시 후한 말기 뤄양(낙양성)이다. 과거 중국 대륙이 뤄양을 중심으로 움직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뤄양의 역사는 흔히들 ‘중국 역사의 축소판’이라 불린다. 송대 역사학자 사마광은 ‘역사의 흥망을 알고 싶거든 낙양성을 보라’는 말을 남겼다.
신중국 설립 후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등 지도부는 풍부한 지하자원을 기반으로 이 곳을 중국 최초 공업기지로 육성했다. 중국의 국가발전전략이 처음 시행된 1차 5개년 규획(1953~1958년)기간 마오쩌둥은 '사회주의 공업화'를 강조하며 소련의 경제모델을 채택해 농업과 중공업 발전에 치중했다. 당시 추진된 157개 중점 프로젝트 중 7개가 뤄양에 집중됐다. 이때 설립된 뤄양제일트랙터는 최초의 중국산 트랙터 둥팡훙(東方紅)을 출시하는 등 중국 공업발전의 씨앗이 됐다. 뤄양제일트랙터는 오늘날 중국 최대 트랙터 기업으로 발돋움 했다.
하지만 개혁개방 이후 내륙지역에 위치한 뤄양은 동부 연해 지역에 위치한 상하이·선전 등에 비해 발전이 더뎠고, 공업지대는 노후화되면서 중국 낙후 도시의 대명사로 전락했다.
뤄양이 다시 경제발전의 빛을 본 것은 중국 원자바오(溫家寶) 전 총리가 내륙발전 계획인 '중부굴기' 전략을 제창한 2004년부터다.
이듬 해인 2005년 중국 허난성은 성도 정저우(鄭州)에서부터 뤄양까지 총 240km 거리의 지역을 하나의 벨트로 묶어 공업메카로 발전시킨다는 ‘정뤄도시공업벨트(鄭洛城市工業走廊)’프로젝트를 가동했다. 오늘날 뤄양에 투자한 글로벌 500대 기업은 모두 25곳에 달하는 등 점차 노후공업도시 이미지를 벗고 신흥 산업도시로 탈바꿈 중이다.
중국 수천년 역사의 고도 뤄양은 중화 문명의 요람답게 중국 대표 관광도시이기도 하다. 지난해 1~10월 뤄양 관광객은 8500만명에 육박했다. 관광수입은 548억3000만 위안(약 9조5000억원)에 달했다. 중국내 최초로 불교가 전파된 곳 답게 최초 불교사원인 백마사(白馬寺)를 비롯해 중국 3대 석굴 중 하나인 용문(龍門)석굴, 인근 쑹산의 소림사(少林寺) 등 불교 유적지가 많다. 그래서 미얀마, 인도, 싱가포르 등 동남아 지도자들이 중국을 방문할 때 한 번씩 들르는 도시가 됐다.
뤄양은 역사가 오랜 도시답게 음식문화도 발달했다. 과거 측천무후가 즐겨 먹었던 궁중 만찬은 오늘날 ‘뤄양수이시(洛陽水席)’라는 이름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물처럼 흐르듯 요리가 나온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특히 측천무후가 ‘제비집 요리 같다’고 칭찬한 ‘옌차이(燕菜)’는 오늘날 뤄양의 대표요리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