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스페셜]14년전 시진핑 인터뷰, 그가 말하는 그의 인생
2015-01-11 14:31
유일한 개인인터뷰 최근에 다시 회자되, 그의 경험과 비전 담담한 소개
◆35세 젊은 관료의 강단있는 반부패운동
시진핑은 1988년 35세의 나이에 닝더(寧德)시 서기에 임명됐다. 젊은 나이의 시진핑은 당시 강도높은 반부패운동을 돌파구로 삼아 닝더의 경제에 활력을 돌게 했다. 닝더에서 2년여 일한 후 그 실적을 인정받은 시진핑은 1990년 푸저우(福州)시 서기로 영전해갔다. 아래는 시진핑의 닝더시절 회고다.
시진핑 : 닝더에 가기전 나는 샤먼(厦門)에서 3년동안 부시장을 했다. 주로 개혁개방과 특구 건설을 추진하는 등의 일을 했다. 푸젠성 위원회는 내가 샤먼에서의 개척 정신을 높이 평가해 경제적으로 낙후돼 있던 닝더시 서기로 전직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때 당시 푸젠성 조직부장이였던 자칭린(賈慶林) 동지가 나를 찾아와 “당신이 닝더에 가서 그 곳을 바꿔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천광이(陳光毅) 서기와 왕자오궈(王兆國) 성장 역시 나의 닝더행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닝더에서 지역개발에 대한 목소리가 높았지만 나는 닝더의 경제적 기초가 취약해 높은 이상만을 추구할 수 없었다고 판단했다. 차라리 착실하게 기초를 닦는 일을 더 많이 해야 했다. 그보다는 간부들의 부패상이 심각했다. 반부패운동을 하려하자 “이 곳 당원과 간부들의 미움을 사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몇 백 명의 미움을 사는 것이 낫습니까 아니면 몇 백만 명의 미움을 사는 것이 낫습니까. 소수를 두려워해야 합니까 아니면 다수를 두려워해야 합니까”라고 반문했다.
◆편안한 생활이 두려웠다
시진핑:여유롭고 한가한 생활이 오히려 나를 초조하고 불안하게 했다. 지방으로 내려갈 것을 결정했지만, 당시 많은 사람들이 나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다. 당시 국방 부장이자 정치국 위원이였던 겅뱌오 동지는 기층에 가고 싶다면 야전부대로 갈 것을 권유했다. 그때 베이징에서 지방으로 간 사람은 사실상 류위안(劉源, 류샤오치의 아들로 현재 총후근부 정치위원)과 나 두 사람뿐였다. 일부 사람들은 ‘문화대혁명’ 시기 많은 고생을 하고 드디어 베이징에 돌아왔다는 생각과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심리를 가지고 있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의 활동범위가 반경 50㎞에 불과하여 베이징을 떠나지 못하고, 베이징을 떠나 호구(戶口)를 잃어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는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날 선배 세대들은 모든것을 버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우리가 문화대혁명 때 하방한 것은 부득이한 선택이었지만, 하방경험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고, 체험했다. 우리는 더욱 분투하고 노력해야 한다.
◆단결은 만사 성공의 기본조건
시진핑은 어느 곳에서 어떤 직책으로 일을 하든 조직원들을 잘 단결시키기로 유명하다. 조직원의 단결은 어려운 문제이며, 특히 13억 인구의 중국인들을 단결시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조직을 단결시키는 문제에 대해 시진핑은 뚜렷한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시진핑:일을 함에 있어서 성공으로 이끄는 요인들은 많을 수 있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단결은 영원한 성공의 전제이다. 또한 단결은 당신이 실패하지 않는 필연적인 전제이기도 하다. 단결의 중요성에 대해 나는 어린시절부터 가정교육을 받아왔다. 나의 아버지는 늘 단결의 도리를 말해주었고, 어려서부터 우리에게 단결을 잘해내야 한다고 가르쳤다. 아버지는 늘 어떤 일에서든지 자신이 하고 싶은지 하기 싫은지만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떤 일에서든 자신만을 중심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배웠다.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서 아버지의 가르침이 옳았다는 것을 더욱더 절감하게 됐다. 조직이 단결하면 일처리가 비교적 수월하게 잘 되었고, 조직이 단결치 못하면 어떤일도 진척이 더뎠다.
◆아버지 비판문을 직접 읽다
1969년 문화대혁명의 광풍에 휘말린 16세의 시진핑은 아버지가 일찍이 전투했던 혁명 근거지 옌안(延安)으로 가서 생산대에 입대하겠다고 신청했다. 이 때부터 6년여의 하방생활이 시작된다. 1974년 중국공산당 입당에 성공하기까지와, 1975년 칭화대학에 입학하기까지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시진핑 : 하방시절 지역내 공산당위원회에서는 내가 간부가 되어 일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당원이 이니었기에 지역 간부가 될 수 없었다. 당시 나는 이미 10번의 입당신청을 했었다. 하지만 가정상의 문제(아버지인 시중쉰이 주자파로 몰려 있는 상황)로 인해 번번이 거절됐다. 1974년 현 위원회 서기는 확실히 내가 필요하고 아버지의 문제로 나의 입당 문제에 영향을 줄 수는 없다고 말했고, 나의 입당은 그제서야 허가됐다. 그리고 곧바로 량자허 대대 지부 서기가 되었다.
농촌에서도 반동분자에 대한 비판활동이 이뤄졌다. 비판대상은 류샤오치(劉少奇), 덩샤오핑(鄧小平), 펑더화이(彭德懷), 가오강(高崗), 시중쉰(習仲勳) 등이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몇 없었기에 비판문은 주로 내가 읽었다. 아버지에 대한 비판문을 내가 읽어야 했기에, 처음에는 몹시 마음이 상했지만 이내 일상적인 일이 되었고 전혀 개의치 않게 될 수 있었다. 1973년에 되어서 대학진학 시험에 집중했다. 하지만 나와 같은 가정 배경을 가진 사람이 학교에 뽑힌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1975년에 들어서 아버지가 감시에서 풀려났고, 나는 현지 정부로부터 칭화대학교 공농병(工農兵) 청강생으로 추천되었다.
◆승진은 사람이 결정 못해
국방부장 비서실에서 벗어나 허베이성의 시골마을 지도자로 자리를 옮긴 1983년이 시진핑이 정치생활을 시작한 때로 볼 수 있다. 인터뷰 당시 시진핑은 정치경력 17년차의 촉망받는 미래주자였다. 그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포부를 이렇게 설명했다.
시진핑 : 인생의 길은 자기자신이 선택하는 것이다. 정확한 길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굳은 이상과 신념이 있어야 한다. 신념이 없다면 아무리 환경과 운이 좋더라도 그릇된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다. 나는 정치의 길에 들어서기 전에 두가지 다짐을 했었다. 첫째는 관료가 되기로 뜻을 정한 만큼, 청렴하게 큰 일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정치를 하는 한 재산을 모으기를 포기했다. 큰 일을 하기로 마음은 먹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큰 관료가 되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정치를 하면서 돈을 벌려 한다면 탐관오리가 될 것이며 마지막 모습 역시 좋을 수가 없다. 비록 일생동안 별다른 큰 업적을 내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청렴한 관리로 명성은 남기겠다고 다짐했었다. 두번째 다짐은 승진을 최상의 목표로 두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능력이 뛰어난다고 해서, 혹은 네트워크가 뛰어나다고 해서 승진되는 것은 아니다. 천시(天時)와 지리(地利), 인화(人和) 등 조건이 어우러져야지 승진이 되는 만큼, 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승진에 욕심을 두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지금도 나는 승진에 대해서는 흔들리지 않은 평상심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