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단물 빼고 단단해진 배우, 황정음

2014-11-06 12:12

[사진 제공=씨제스엔터테인먼트]

아주경제 김은하 기자 = 머리를 양 갈래로 따고, 썬 캡이나 발토시 따위의 액세서리를 한 채 “아껴둔 내 마음을 그대를 위해 드리겠다(그룹 슈가의 ‘Shine’)”고 노래하던 황정음. 아니 동그란 눈을 끔벅거리며 어눌한 한국말로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한 일본인 멤버 아유미에 밀려 빛도 못 봤던 걸그룹 멤버 황정음은 어느새 ‘눈물의 여왕’을 트레이드 마크로 37부작 드라마를 책임지는 명실상부한 배우가 됐다.

황정음은 지난해 말 방송된 KBS 드라마 ‘비밀’에 이어 지난달 26일 종영한 ‘끝없는 사랑’에서도 쉴 틈 없이 울었다. 울다 지쳐 퉁퉁 부은 눈두덩이로 대사를 읊조리거나, 분노의 눈물이 차오른 채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눈물의 여왕이 됐다”고 했더니 “에이, 될 뻔한 거죠. 사실 ‘끝없는 사랑’이 많이 사랑받지는 못 했잖아요”라고 먼저 선수를 친다. 또랑또랑한 목소리에는 두툼한 강단이 배어 있고, 한음절 한음절 야무지게 끊어 말하는 어투는 확신에 찼다.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애써 꾸미지 않고 날것 그대로 툭툭 꺼냈다.

한 자리대 시청률로 끝을 낸 ‘끝없는 사랑’의 시작은 호기로웠다. 1980년대 혼돈의 시대를 사는 젊은이의 사랑과 욕망을 담는다는 거창한 기획의도와 송승헌에게 연기 대상을 안긴 MBC ‘에덴의 동쪽’과 같은 굵직한 시대극을 집필한 나연숙 작가가 투입됐다. 무엇보다 대중이 ‘끝없는 사랑’에 기대를 건 가장 큰 이유는 드라마 ‘비밀’을 통해 연기력 논란을 완전히 벗고, 안티팬을 팬으로 돌리는 데 성공한 황정음이 연이어 비련의 여주인공을 맡아서였다.

“욕심이었죠. ‘비밀’로 최우수상을 받으니 대상도 욕심나더라고요. 미니시리즈보다는 ‘끝없는 사랑’ 같은 대작을 해야 가능성이 커지지 않겠어요? 비극적 여주인공의 정점을 찍어 보자는 생각도 했고요. ‘이렇게 어려운 역할, 다 마다하겠지만 나는 한다’고 자신하며 덥석 출연한다고 했죠. 자만했습니다.”

황정음[사진 제공=씨제스엔터테인먼트]

자만이 아니었다. 출생의 비밀을 안고 태어나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하고 억울한 누명을 안고 교도소로 끌려간 후 정치적 음모에 휘말려 고문을 당하는 서인애를, 강간당해 낳은 아이를 살뜰히 키우고 모진 고통 속에서도 검사를 거쳐 법무장관까지 된 파란만장한 여인을 선뜻하겠다고 나서는 배우가 몇이나 될까? 조기 종영을 면치 못할 정도로 시청자가 ‘끝없는 사랑’을 외면한 이유는 황정음 때문이 아니었다.

“대본의 개연성이 떨어질수록 연기자가 풀어야 할 숙제는 커지죠. 대본의 헐거운 구멍을 연기력으로 조여야 하니까요. 그래도 군소리 없이 잘했는데…. 마지막회 대본을 받고는 감독님께 처음으로 전화했어요. ‘이야기의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다’고요. 작가님도 쉽지 않았겠죠. 40회분의 스토리를 37회에 욱여넣어야 했으니까요.”

서인애는 부러지지도 휘어지지도 않고 고집스러웠다. 성적 유린과 모진 고문도 학생 운동을 향한 집념을 꺾지 못 했다. 사형 선고를 받고도 운동권을 떠나지 않는 서인애의 억지스러운 오기는 시청자를 지치게 했다. 하지만 황정음도 서인애 못지않았다. 서인애의 고집을 더 고집스럽게 놓지 않고 당차게 연기했다.

“우여곡절 끝에 법무부 장관까지 된 여자가 남의 말에 휘둘리면 되나요. 고집 센 사람이 세상을 바꾸니까요. 왜 드라마의 여주인공은 항상 착하고 사랑스러워야 하죠? 시청자 비난에 제가 연기 방향을 바꿨다면 캐릭터 전체가 무너졌을 겁니다. 작품을 생각하지 않고 저만 생각했다면 서인애의 고집을 뺄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저는 끝까지 (연기에 있어) 양심적이었어요. 가끔 최선을 다하지 못한 순간이 있긴 했지만 그 양심을 놓친 적은 없어요.”

황정음[사진 제공=씨제스엔터테인먼트]

드라마를 하나하나 끝낼 때마다 다른 사람이 돼 있다는 황정음은 ‘끝없는 사랑’을 마친 자신을 “아줌마 같다”고 표현했다.

“MBC ‘골든타임’이 끝났을 땐 얼른 다른 작품으로 힐링하고 싶다는 생각에 촉박했어요. 하도 욕을 많이 먹어서요(웃음). ‘비밀’이 끝났을 땐 사랑을 많이 받아서 여유로웠고 베풀고 싶었죠. 지금은 남 탓만 하는 아줌마가 된 것 같아요. 남 탓하고 불평하고…쓸데없는 일에 에너지를 소비했어요.”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 결국 다 내 탓이더라”고 말을 바꿨다. 깨달음이다.

“‘골든타임’이 정말 쪽대본이었어요. ‘세상에 의학 드라마가 쪽대본이라니!’ 눈알이 핑핑 돌 지경이었죠. 하지만 이성민 선배는 기어코 해내더라고요. 상황이랑 상관없이 언제나 기필코 해내는 배우가 있어요. 반성해요. 결론적으론 다 제 탓이더라고요.”

가혹하리만큼 제 탓을 하는 이 배우는 “배우들 참 불쌍해”라고 남 얘기하듯 말했다. 평생 대본과 치열하게 싸우고 언제나 대중에게 평가받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그는 ‘불쌍한 배우’를 계속하고 있다. 2005년 ‘루루공주’부터 10년 동안 매년 한 작품 이상씩 선보이고 있다. 즐기는 눈빛이 선명하다.

“연기할 땐 매번 후회하고, 매번 한계에 부딪히면서도 매번 감사해요. 연기만큼 열 받게 하는 게 없어요, 9년 째 만나고 있는 남자친구(SG워너비 김용준)보다 더 열 받게 하는 유일한 게 연기거든요. 그런데 연기만큼 좋은 게 또 없네요.”

황정음이 ‘끝없는 사랑’ 종영 후 인터뷰를 자청했을 때, 흥행작 ‘비밀’이 끝난 뒤에도 마다했던 것을 왜 하필 지금 할까 궁금했다. 황정음에게는 자랑보다는 하소연, 칭찬보다는 위안이 필요했다.

“작품이 잘 될 때에는 할 말이 없어요. 미련 없이 연기했고, 다들 잘했다고 해 주시니까요. 인터뷰 내내 ‘저 잘했죠?’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웃음). ‘끝없는 사랑’을 찍으면서는 많이 외롭고 힘들었어요. 얘기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 위로받고 싶었던 것 같아요.”

기대 이하의 성적을 보여 준 ‘끝없는 사랑’ 통해 초심을 찾았다는 황정음, 10년 동안 쉬지 않고 달려온 그는 연기가 절실해질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다부지게 말했다.

“침대에 누워 과자 먹으면서 제 작품을 쭉 볼 거예요. 연기의 맛을 알게 해 준 MBC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부터요. 몇 날 며칠이 걸리든 간에요. ‘끝없는 사랑’도 볼 거냐고요? 당연하죠.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 있나요. 욕먹어도, 시청률이 낮았어도 제 분신인 걸요.”

황정음은…
황정음은 지난 2002년 아이돌 걸그룹 슈가로 데뷔했다. 슈가의 인기에 비해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던 그는 2004년 탈퇴를 선언하고 연기로 방향을 틀었다.

2005년 SBS ‘루루공주’를 통해 안방극장에 데뷔해 SBS ‘사랑하는 사람아’(2007), MBC ‘겨울새’(2008),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2008), ‘에덴의동쪽’(2009)과 채널CGV ‘리틀맘 스캔들 1‧2’(2008) 등 지상파 조연과, 케이블 채널 주연을 오가며 차근차근 필모그래피를 쌓았지만, 아이돌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떼지는 못했다.

황정음을 향한 대중의 시선이 따뜻해진 것은 MBC 예능프로그램 ‘우리결혼했어요시즌2’부터다. 공개 연애 중인 SG워너비 김용준과 출연해 당차고 발랄한 모습으로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후 지상파 드라마 주연을 줄줄이 꿰찼다.

MBC ‘골든타임’(2012)으로 다시 연기력 논란에 빠졌던 그는 KBS2 ‘비밀’(2013)로 모든 우려를 불식시켰다. 최근 SBS ‘끝없는 사랑’이라는 37부작 대작을 원톱으로 이끌며 연기자로서 입지를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