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중국역사> 개혁개방 역사의 시작, 11기 3중전회 개막
2013-12-15 17:45
아주경제 한오종 기자 =
▲ 12월18일(수) - 1978년, 중국공산당 제11기 3중전회 개막
중국 개혁개방 역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제11기 3중전회가 22일까지 5일간 베이징에서 개최됐다.
11기 3중전회에서는 문화대혁명 시기 마오쩌둥의 과오가 규명되기 시작했다. 특히 마오쩌둥이 후계자로 지목한 화궈펑(華國鋒)주석의 ‘마오 주석의 결정과 지시는 무조건 옳다’라는 ‘양개범시(兩個凡是)’론이 철저히 배척됐다. 그러나 공산당의 투쟁과 중국 건국 과정에서 마오의 역할에 대해서는 높은 평가를 유지했다.
회의를 통해 사상해방(思想解放), 지식발휘(開動腦筋), 실사구시(實事求是), 일치단결하여 미래를 향하여 나아간다(團結一致向前看)를 향후 정치 슬로건으로 확정했다. 이로써 중국은 개혁개방의 길로 나아가기 시작했으며 11기 3중전회는 마오쩌둥 시대의 폐막과 중국의 2세대 지도자 덩샤오핑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무대가 됐다.
제11기 3중 전회란,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의 줄임말로 이때를 시작으로 역대 3중전회는 ‘개혁’이 주제가 됐다. 이러한 전통은 지난 11월에 끝난 제18기 3중전회까지 이어지고 있다.
중국 최초의 증권거래소가 상하이에 개설됐다.
이날 상하이증권교역소(上海证券交易所)는 개소 행사를 갖고 교역을 정식으로 시작했다. 개소행사에는 당시 상하이시 시장이었던 주룽지(朱镕基) 총리가 참석을 했다.
상하이 증권거래소는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이후 5월21일 주식거래가격이 전면적으로 공개되었고 23일까지 무려 570%라는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1992년 5월23일을 중국 주식 시장의 탄생일로 간주하기도 한다.
▲ 12월20일(금) - 1999년, ‘동양의 라스베가스’ 마카오 반환
중국의 마지막 남은 할양지, ‘동양의 라스베가스’ 마카오가 중국으로 반환됐다.
포르투갈 인이 1557년에 명(明)의 관군(官軍)을 도와 해적토벌에 참가한 대가로 마카오 거주권을 얻은 이래 442년 만이다.
1680년 처음으로 총독이 임명되었고 1717년부터 유럽 여러 나라 선박에 마카오 항을 개방하여 광둥무역의 근거지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홍콩이 개항된 후 그 중요성은 줄었으나 포르투갈은 1887년 중국-포르투갈 우호통상조약(Protocol of Lisbon)을 체결 마카오는 정식으로 포르투갈에 영구 할양됐다.
이후 1955년 중국이 마카오 지역에 대한 영토권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한다. 1976년 포르투갈의 마카오 기본법(Macau Organic Law) 통과로 마카오는 입법, 행정, 재정 등에 관해 대폭적인 자치권을 획득하게 된다. 1979년 중국과 포르투갈이 국교를 수립하게 되고 마카오에 대한 중국의 영토권이 인정되기에 이른다. 1987년 양측은 마침내 1999년 마카오 반환을 조인했다.
▲ 12월22일(일) - 1968년, 하방(下放) 운동 본격시작
이날 <인민일보>는 ‘지식청년들은 가난한 농촌에 가서 재교육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는 마오쩌둥의 문장을 게재했다. 이로부터 대규모 하방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하방운동이란 50년대 주창되고 60년대부터 70년대 문화대혁명시기까지 이루어졌으며 지식인들이 도시를 떠나 농촌에 정착하는 정치운동이었다. 중국공산당은 하방운동의 목적을 ‘수정주의’(자본주의)를 방지하고 청년들이 ‘가난한 농촌에서 생활하며 재교육’받기 위함이라고 했다.
1968년 중고등학생 대부분이 농촌을 향했고, 문화대혁명(1966~1976년) 중 농촌을 향한 지식청년들의 총수는 1600만 명 이상이었다. 문화대혁명 3년째인 1968년 여름 대학은 신입생을 선발하지 않았고 공장에서는 새로운 직공을 뽑지 않았다.
현재 후진타오 전주석, 원자바오 전총리 등 정치국 상무위원 대부분이 하방을 경험했다. 현재 1950년대 생인 5세대 인사들의 상당수 인사들이 늦게 대학을 들어가게 된 것은 이러한 하방의 영향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