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중국역사> 마오쩌둥 아들, 6.25전쟁에서 전사
아주경제 한오종 기자 =
▲ 11월25일(월) - 1950년, 마오쩌둥 아들 사망
1950년, 마오쩌둥의 장남인 마오안잉(毛岸英)이 28세의 나이로 6.25전쟁에서 미군기의 폭격으로 인해 전사했다.
마오안잉의 인생은 젊어서부터 파란만장했다. 8세 때 이미 모친과 함께 투옥됐으며, 모친이 국민당군에게 처형을 당한 후 감옥에서 풀려나왔다.
안잉을 비롯해 안칭(岸靑), 안룽(岸龍) 등 3형제는 상하이에 있는 공산당 지하조직에 가입을 했으나 조직이 와해되면서 이들도 상하이 거리를 떠돌게 되었다. 이 때 막내동생 안릉은 실종된다. 안잉, 안칭 두 형제는 신문팔이, 폐품수집, 인력거 밀기 등을 하며 살아갔다.
1936년 안잉은 공산당의 배려로 소련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소련에서 군사학교를 다녔고 독소전쟁 발발 이후 소련 탱크 부대의 당대표이자 중위가 되었다. 소련군을 따라 동구 국가 전선에 투입되기도 했고, 스탈린으로부터 직접 권총을 선물받기도 했다.
소련에서 귀국한 안잉은 아버지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농촌으로 갔다. 농촌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던 그는 6.25전쟁 발발 후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를 따라 참전, 번역 및 참모 역할을 수행하다가 1950년 11월 25일 오전 11시 미군기의 폭격으로 사망하게 된다.
마오안잉의 유해는 중국으로 귀환되지 않고 북한에 묻혔다. 북한은 사망지점 인근인 평안남도 회창(檜倉)에 중국지원군 열사릉을 조성했고 중국 지도자들은 방북 때 마다 마오안잉의 묘를 참배하고 있다.
한편, 사람들은 만일 마오안잉이 전사하지 않았다면 마오쩌둥에 이어 후계 세습 체제가 갖추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마오안잉이 능력이 출중했으며 마오의 총예를 받고 있었고 당, 정, 군에서 여러 경험을 쌓았기 때문이었다.
▲ 11월26일(화) - 1905년, 삼민주의 등장
중국 혁명의 아버지 쑨원(孫中山)의 삼민주의(三民主義)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1905년 11월 26일 중국 동맹회(同盟會) 기관지 ‘민보(民報)’가 일본 도쿄에서 창간되었다. 창간호에서 쑨원은 처음으로 ‘삼민주의(三民主義, 민족·민권·민생주의)’를 언급했고 이후 국민당의 정치강령이 되었다.
▲ 11월29일(금) - 1976년, 중국 최초의 외국 드라마 방영
중국 최초의 외국 TV 드라마가 중국중앙방송(CCTV)를 통해 방영되었다. 해당 외국 드라마는 유고슬라비아(南斯拉夫)에서 제작한 ‘적후방 침투(巧入敵後)’로 전체 13편이고 편당 95분이었다.
▲ 11월29일(금) - 1974년, 펑더화이(彭德懷) 사망
중국인민해방군 창설자 중의 한 사람이며 6.25전쟁 당시 중국 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을 지낸 '조선전쟁의 영웅' 펑더화이(彭德懷)가 향년 76세의 나이로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그는 1950년 총사령관으로 6.25전쟁에 참전했고, 54년 국방위원회 부주석·국무원 부총리·국방부장·당중앙정치국원 등을 역임하며 군의 근대화를 추진하였으며, 1955년 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1959년 마오의 대약진 운동과 인민공사화의 피폐를 목격하고 마오에게 서신으로 문제점을 전달했다. 서신에서 마오의 위상과 자존심을 자극하지 않게 조심스럽게 충언을 했으나 마오는 이를 자신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고 결국 그해 국방부장에서 해임되었으며 1966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1966년 문화대혁명 당시 마오쩌둥을 신처럼 받들던 홍위병의 공격대상이 되어 박해를 받았으며 1974년 암으로 사망했다. 1978년 마오쩌둥 사망이후 사면이 이루어졌고, 덩샤오핑에 의해 모든 명예가 회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