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기의 수레바퀴] 회장님

2009-02-06 08:24

독재 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1987년 어느 청년이 코미디 프로에 나와 세상 모든 회장님들의 회장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린 적이 있다. 패러디가 무엇인지 진수를 보여준 것이다.

알다시피 지난 2006년 유명을 달리한 故 김형곤씨를 말함이다. 그가 1987년 ‘유머 1번지’에서 선보인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 코너는 5공화국 시절 국민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하며 한국형 시사 코미디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기득권층의 무사안일과 복지부동을 꼬집은 ‘잘 돼야 될 텐데’나 ‘잘 될 턱이 있나’와 같은 여러 유행어들을 남기기도 했다.

포스코가 정준양 차기 회장의 임기문제로 고심하고 있다. 1년이냐 3년이냐를 놓고 6일 오전 10시 열리는 이사회에서 결정할 예정이다. 마라톤 회의가 예상되는데, 아마도 3년이 유력하지 않나 싶다. 이미 사외이사들은 이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된 듯하다. 이사회 구성원 14명 중 사외이사가 8명으로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정 내정자가 이구택 회장의 남은 임기를 채우고 재신임을 받거나 다른 이를 회장에 앉힐 경우 회사가 또 다시 내홍을 겪을 가능성이 높은 만큼 사외이사들이 이를 차단하려는 것이다.

경제위기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최고경영자(CEO)의 자리가 회전문 인사로 남용돼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런 때 일수록 최고경영자의 흔들림 없는 리더십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1년이라는 시간은 정 내정자에게 리더십을 요구하기엔 짧다.

‘CEO후보추천위원회’ 위원장 서윤석 이화여대 교수는 임기를 3년으로 하는 방안에 대해 “회장 내정자 결정 과정에서 이미 임기문제를 공식 의제로 올려 논의했다”고 말했다. 당시 추천위원 8명의 의견이 1년으로 임기를 할 경우 리더십이 흔들리고, 청탁에 약할 수밖에 없는 만큼 3년 임기로 가야한다고 입을 모았다.

방법은 정 내정자가 상임이사 임기 1년을 포기하고 27일 열리는 주총에서 3년 임기의 상임이사로 재선임하는 것이다. 내년에 다시 재신임 받을 필요도 없어져 회장 임기도 자연히 3년으로 연장된다.

그러나 당사자인 정 내정자는 이에 대해 별 말을 하지 않고 있다. 자리에 연연한다는 이미지를 줄까 우려하는 것이다. 포스코 역시 입을 닫아걸었다. 임기 문제는 이사회의 고유권한이기 때문에 가타부타 말을 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그동안 국내외 기업들 눈에 비친 포스코의 모습은 회장님 하나로 인해 휘청거리는 기업이었다. 그러나 글로벌 불황이 온 세계를 덮은 지금, 포스코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이전의 회장 선임 과정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일이다.

그러나 즐거운 마음으로 관전하고 있는데, 한쪽 구석은 영 찜찜하다. 밝은 눈에 열린 생각을 가진 사외이사들의 힘이 아니었다면 이런 일이 생겼을까?

김훈기 기자 bom@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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