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27일 인도네시아에서는 주지사 37명, 시장 93명, 도지사 415명을 선출하는 지방선거가 치러졌다. 이번 선거는 지난 2월 대선과 총선 이후 9개월 만에 실시된 것으로, 프라보워 수비안토 대통령의 그린드라(Gerindra)당이 정치적 영향력을 얼마나 확대할 수 있을지, 그리고 야당 역할을 하고 있는 PDIP(인도네시아 투쟁민주당)가 정치적 위상을 유지할 수 있을지를 가늠할 중요한 계기였다.
주지사 선거에서 나타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린드라당의 약진이었다. 37개 주 중 그린드라 소속 후보가 9곳에서 주지사로 당선되었는데, 이는 이전 선거에서 주지사를 2명만 배출했던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성과였다. 또 그린드라당이 속한 정당연합 소속 후보가 14곳에서 당선되면서 프라보워 대통령에 대한 대중적 지지세가 강하게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자카르타 주지사 선거는 인도네시아 정치의 복잡성과 정치적 협잡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선거 초반 유력 후보로 떠오른 인물은 서부 자바 주지사 출신으로 높은 대중적 인지도를 지닌 리드완(Ridwan)이었다. 그는 그린드라당 당원이 아니었지만 대선에서 프라보워를 지지한 정당연합 소속으로 이 연합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의 대항마는 자카르타 주지사를 역임하고 지난 대선에서 프라보워와 경쟁해 2위를 차지한 아니스 바스웨단(Anies Baswedan)이었다.
후보 등록일을 한 달여 앞두고 예상치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아니스를 지지하던 세 정당이 갑작스럽게 지지를 철회한 것이다. 이에 따라 아니스는 후보 등록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인도네시아 선거법에 따르면 지방선거 출마를 위해서는 지방의회 의원 20% 이상의 지지가 필수였다. 이는 과도한 후보 난립을 방지하려는 취지로 제정되었으나 정당 간 연합을 필수적으로 요구함으로써 정치적 거래를 조장하는 규정이기도 했다. 이러한 조건에서 보통 3개 내외의 정당이 연합해 후보를 선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아니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세 정당은 리드완 지지로 방향을 틀었다. 이로 인해 자카르타 의회에 의원을 보유한 11개 정당 중 PDIP를 제외한 10개 정당 모두가 리드완 지지를 선언한 셈이 되었다. 게다가 자카르타 의회에서 PDIP 의원이 차지하는 비중이 선거법 기준에 미달하는 15%로 독자 후보를 낼 수 없게 되면서 리드완의 단독 출마 가능성을 거론할 수 있게 되었다.
단독으로 출마한다고 해서 반드시 당선을 보장받는 것은 아니었다. 인도네시아의 독특한 선거 관행에 따라 후보가 한 명뿐일 때는 투표용지에 1번으로 후보자 이름을, 2번으로 ‘빈칸(kotak kosong)'을 배치하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단독 후보가 출마한 선거는 흔히 ‘빈칸’ 후보와의 경쟁으로 불리기도 했다.
일반적으로는 단독 후보가 ‘빈칸’ 후보와의 대결에서 승리했다. 2015년 빈칸 방식이 도입된 이후 ‘빈칸’이 인간 후보를 이긴 사례는 단 한 차례였다. 그러나 올해 선거에서는 단독 후보가 출마한 44개 선거구 중 두 곳에서 ‘빈칸’ 후보가 승리해 내년 재선거가 예정되었다. 선거 유세 기간 중 시민단체가 ‘빈칸’ 후보를 지지하는 캠페인을 벌일 정도로 빈칸 투표는 기존 정치인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12개 정당 중 11개 정당의 지지를 받은 리드완에게 있어 ‘빈칸’ 후보는 그리 큰 위협이 아닐 듯했다. 그러나 자카르타 주지사라는 직위가 가진 상징성, 그리고 집권 여당에 대한 불만이 집중될 가능성을 고려하면 ‘빈칸’ 후보의 득표율은 심각한 파장을 미칠 수 있었다. 만약 후보가 되지 못한 아니스와 PDIP가 조직적으로 반발한다면 리드완이 ‘빈칸’ 후보를 압도하지 못하는, 심지어 ‘빈칸’ 후보에게 패하는 황당한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리드완에게는 예상치 못한 구세주가 나타났다.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 독립 후보로 입후보한 것이다. 선거법에 따르면 정당 지지를 받지 않더라도 유권자 7.5%의 지지를 받으면 후보가 될 수 있는데, 이 독립 후보자가 기준을 초과하는 61만여 명의 지지자 명부를 선관위에 제출했다. 하지만 이 명부가 조작되었다는 의혹이 곧바로 제기되었다. 아니스의 가족조차 자신이 독립 후보의 지지자로 등록되어 있다는 주장을 할 정도였다. 대중적 인지도가 없는 인물이 짧은 기간에 60만명 이상의 지지를 얻었다는 사실은 의심스러웠지만 선관위는 재빠른 확인 절차를 거쳐 독립 후보의 등록을 허용했다. 이로써 리드완은 ‘빈칸’ 후보와의 대결을 피할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사건의 연속이던 후보 등록 과정은 막바지에 이르러 또다시 격변에 휩싸였다. 등록일을 얼마 남기지 않은 상황에서 헌법재판소가 지방의회 의원 20% 지지 요건을 위헌으로 판결하고, 이를 7.5%로 낮추는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이는 독립 후보와의 일대일 대결을 준비하던 리드완에게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반면 후보 등록조차 할 수 없었던 아니스와 PDIP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다. PDIP가 아니스를 지지한다면 리드완과의 빅매치가 성사될 수 있었다.
주지사 후보 등록을 둘러싼 한 편의 드라마에서 PDIP는 아니스를 주인공으로 선택하지 않고, 자당의 프라모노(Pramono)를 후보자로 낙점했다. 다선 의원 출신으로 장관급 직책인 국가 비서를 역임했지만 대중적 인지도가 낮았던 프라모노의 등장 역시 쉽게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스의 PDIP 당원 가입 거부가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타 정당 정치인과의 연합이 흔한 인도네시아 정치 현실에서는 설득력이 부족했다.
리드완의 입장에서 프라모노의 등장은 반가운 결과 중 하나였다. 리드완과 프라모노를 대상으로 한 9월 여론 조사는 이를 예시했다. 리드완이 50%대 지지율로 30%대인 프라모노를 상당히 앞서갔다. 당시만 해도 주지사 선거 결과는 명확해 보였다.
그러나 10월과 11월을 지나며 여론의 흐름이 조금씩 바뀌었고, 선거 막바지에는 프라모노가 여론 조사에서 리드완을 앞서기 시작했다. 이제는 프라모노의 승리가 아니라 그의 과반 득표가 관심 대상이 될 정도였다. 실제 선거에서 그는 50.3%를 득표함으로써 2차 선거 없이 자카르타 주지사로 확정되었다.
두 후보 간 뚜렷한 정책 차이가 없었고, 선거 캠페인 과정에서 승부를 뒤집을 만한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으며, 프라보워 대통령의 리드완에 대한 지지가 유지되었기에 승부가 뒤바뀐 이유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정치 평론가들은 프라모노와 PDIP의 선거 전략이 효율적이었다는 점, 프라모노의 러닝메이트인 부지사 후보가 리드완의 부지사 후보를 압도했다는 점, 그리고 선거 막바지에 아니스가 프라모노를 공식 지지했다는 점 등을 주 요인으로 꼽았다.
이와 함께 고려되어야 할 변수는 선거 과정에서 드러난 집권 여당의 정치적 협잡이었다. 이러한 행보가 정치적 이득을 위해서라면 무슨 방법이라도 쓸 수 있다는 안하무인의 태도로 비쳤고, 이에 대한 저항으로 대중이 프라모노를 지지했다는 것이다. 이 해석이 적절하다면 집권 여당에 맞설 대항 세력으로 PDIP가 선택되었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자카르타 이외 지역에서 PDIP가 정치적 영향력을 제대로 확인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PDIP는 자신의 핵심 지지 지역인 중부 자바에서조차 패배했으며 북부 수마트라, 중부 칼리만탄, 북부 술라웨시 등과 같이 과거 주지사 자리를 독식했던 지역에서도 전멸했다. PDIP가 승리한 네 개 주 중 두 곳은 파푸아 지역에 신설된 주로, 자카르타를 제외하면 발리가 유일한 승리처였다. 게다가 정당 내부의 의사결정 구조가 민주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평가를 계속 받아왔기에 PDIP를 대안적 정치 세력으로 볼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카르타에서 PDIP의 승리가 가진 중요성을 간과할 수는 없다. 프라모노의 득표율은 2월 대선에서 PDIP 후보가 얻은 득표율의 두 배에 가까웠다. 이는 자카르타 주민이 PDIP를 직접 지지하지는 않더라도 프라보워 대통령의 권위적 통치와 집권 여당 연합의 비민주적 행보에 대한 불만 표출의 수단으로 PDIP를 선택했음을 의미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프라보워 대통령의 독주를 견제하고, 민주화에 대한 대중의 열망을 결집할 역할을 PDIP가 향후 적절하게 수행할 수 있을지 여부는 인도네시아 민주주의의 향배를 가늠할 핵심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