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을 열면 느껴지던 목련향, 명절날 둘러앉아 전을 굽던 기름 냄새, 흰쌀로 저녁밥 짓는 냄새, 생선 장수였던 할머니에게 났던 바다 냄새, 아카시아꽃 향기, 장롱 속 나프탈렌 냄새.
“한국의 향은 무엇인가요?”
각각이 기억하는 향의 형태는 닮은 듯 달랐다. 어떤 이에게 ‘할머니 냄새’는 ‘바다 냄새’였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할머니 냄새’는 ‘오리탕 냄새’ ‘부추 냄새’ 그리고 ‘구덕한 살 냄새’였다.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이 향들은 희한하게도 모두 익숙했다. 배너 속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다 보면 그 이야기에 담긴 향이 코끝을 스쳤다.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기억 조각들을 불러왔다.
이들 ‘향기 메모리’는 한반도에서 태어났거나 잠깐이라도 머물렀던 600명 개개인의 내밀한 이야기들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의 과거와 현재였다.
‘향수에 젖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미술관은 베니스비엔날레 제60회 국제미술전 한국관에서 선보인 ‘구정아-오도라마시티’의 귀국보고전을 개최했다.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과 마찬가지로 구정아 작가가 참여하고, 이설희(덴마크 쿤스트할 오르후스 수석 큐레이터)와 야콥 파브리시우스(덴마크 아트 허브 코펜하겐 관장) 공동 예술감독이 기획했다.
이번 귀국보고전은 베니스비엔날레에서는 공개하지 않았던 ‘향기 메모리’를 소개한다. 앞서 제60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은 관객 참여 형태로 진행됐다. 올해 6월 25일부터 9월 30일까지 약 3개월간 진행된 오픈콜에서 전 세계 사람들은 한반도의 향을 공유했다. 비엔날레팀은 소셜미디어, 광고 등 온·오프라인 채널을 통해 북한 새터민을 포함한 남북한 사람, 비한국인 등 한반도와 연이 있는 익명의 수많은 사람에게 ‘한국(코리아)의 도시, 고향에 얽힌 향의 기억’을 물었다. 이를 통해 한반도 전역에 얽힌 600여 편의 향기 메모리를 모았다. 그리고 조향사 16명은 이들 글 중 선별된 사연과 키워드를 바탕으로 17개 향을 개발했다.
야콥 파브리시우스 예술감독은 이날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귀국보고전은 스토리텔링에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베니스에서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보여주지 못했다. 전시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사람들의 향기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야기들에 집중해서 전시하기로 했다.”
제1전시실은 600여 개 이야기가 담긴 120개 배너로 채워졌다. 이야기는 국문과 영문으로 제공된다. 또한 배너에는 메모리를 공유한 이들의 이름, 출생 연도, 출생 지역과 함께 향기를 맡았던 지역과 시기가 적시돼 있다. 서울, 마산, 밀양, 부산, 북한 등 한반도 곳곳의 저마다 다른 향기 메모리다. 관람객들은 배너 사이사이를 걸으면서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다.
파브리시우스 감독은 김필주 박사의 메모리가 인상 깊었다고 했다. “(김 박사는) 북한에 살다가 남한으로 온 분이다. 그의 북한에 대한 향기 기억은 아버지가 줬던 우유, 그리고 아버지가 만들어줬던 민트향 사탕이다.”
메모리는 향기, 냄새다. 그리고 그리움, 사랑, 외로움 등이기도 하다. 매연 냄새, 유채꽃 향기, 나프탈렌 냄새, 진한 짠내, 두부 냄새, 아카시아꽃 향기, 코티분 향기, 차가운 공기, 매캐한 냄새, 비릿한 냄새, 할머니 살 냄새, 청소용액, 에프킬라 모기향, 구름다리에서 놀고 난 뒤 손에서 나는 냄새 등.
1978년 북한에서 태어난 누군가는 다시 맡을 수 없는 향을 기억했다. “6월 말 7월 초, 온 마을에 백살구 향이 넘쳐나요. 타국이나 한국 그 어디에서도 다시는 맡아볼 수 없는 고향의 그 향기.”
향에는 경계가 없다
텅 빈 제2전시실에는 17개 향기가 뒤섞여 있다. 수집한 이야기들을 토대로 조향사들이 만든 향들은 소형 뫼비우스띠에 담겨 전시장에 공중 부양으로 설치됐다. 이 뫼비우스띠들은 구정아 작가가 손수 만들었다.
17개 향은 도시 향기, 밤공기, 사람 향기, 서울 향기, 짠내, 함박꽃 향기, 햇빛 냄새, 안개, 나무 냄새, 장독대, 밥 냄새, 장작 냄새, 조부모님 댁, 수산시장, 공중목욕탕, 오래된 전자제품, 그리고 오도라마 시티다.
파브리시우스 감독은 향들이 뒤섞이도록 한 것은 구 작가의 의도라고 설명했다. “향은 분자다. 분자를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은 절대 통제할 수 없다. 구정아는 스스로를 ‘모든 곳에서 살고 일하는(lives and works everywhere)’ 작가라고 한다. 작가가 지닌 생각과도 일치한다. 향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으며, 향에는 경계도 없다. 어떻게 흩어지는지에 대해서도 절대 통제할 수 없다. 작가가 의도한 대로 디스플레이된 것이다.”
이설희 감독은 관람객의 경험을 강조했다. “1전시실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간접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면, 2전시실에서는 비어 있는 콘셉트를 통해 스스로가 어떻게 향을 번역하고, 빈 공간을 한번 들여볼 수 있도록 연출했다.”
또한 이 감독은 역사에서 잊힐 법한 사람들을 짚어보는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서 여백, 주위의 사람들, 잊히고 있는 이들을 볼 수 있었다. 이는 오픈콜을 통해서 가능했다. 할머니 냄새를 떠올렸던 이들의 출생 연도는 대부분 1980년대생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맞벌이가 시작되면서 아이들이 할머니 손에서 자라기 시작한 시기다. 한 개인의 메모리 같지만, 사회상도 읽어볼 수 있는 지점이 굉장히 흥미롭다고 할 수 있다.”
한편 2024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전시 및 귀국보고전은 2015년부터 미술전 한국관 전시를 후원해 온 현대자동차가 공식 후원사로 참여하였으며 향을 개발한 논픽션, 루마 재단, 디네슨, 러쉬코리아 등이 후원했다. 전시는 내년 3월 23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