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규모 편의점에 장애인 접근을 위한 편의시설을 설치하지 않아도 되는 법령을 국가가 20년 넘게 개정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했다면 국가배상책임이 인정되는지 여부를 놓고 열띤 공방이 펼쳐졌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이숙연 대법관)는 23일 A씨 등 3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차별구제 청구 등 소송 상고심 사건에 대한 공개변론을 열었다. 이는 2021년 이후 3년 만에 조희대 대법원장이 취임한 후 처음 열린 공개변론이다.
옛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은 지지체장애인을 위한 편의 제공 의무를 부담하는 소규모 소매점 범위를 '바닥 면적 합계가 300㎡ 이상인 시설'로 규정했다. 이에 따라 2019년 기준 전국 편의점 중 97% 이상에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 의무가 없었다.
이 시행령 규정은 1998년 제정 이후 2022년까지 개정되지 않았다. 원고들은 국가가 20년 넘게 시행령을 개정하지 않아 장애인차별금지법 등이 보장한 접근권이 침해됐고, 이를 개정하지 않은 행정입법 부작위가 위법하다고 주장했다.
1심과 2심은 "편의점이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을 설치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국가의 고의·과실이 있다고 볼 수 없다며 국가배상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시행령은 2심 재판 중인 2022년 4월 개정돼 '바닥 면적 50㎡ 이상인 점포'에 대해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를 의무화했다.
이날 공개 변론에서도 △국가가 소규모 소매점의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 의무를 과소하게 규정하고, 개정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이 위법하다고 볼 수 있는지 △행정입법 부작위에 대한 국가배상 책임이 성립하는지가 쟁점이었다.
원고 측은 "편의시설을 설치할 소규모 소매점 범위를 '바닥 면적 합계가 300㎡ 이상인 시설'로 규정함에 따라 원고는 살고 있는 오피스텔 1층에 편의점이 있는데도 문턱이 있어 이용을 할 수 없었다"며 "피고는 다른 노력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장애인단체가 그동안 꾸준히 문제를 제기하고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 등이 개정을 권고했는데도 이행하지 않다가 24년이 지나서야 바닥면적 기준을 50㎡ 이상으로 낮추는 개정을 했다. 개정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도 방치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피고 측은 "쟁점 규정은 대통령령으로 편의시설 대상을 정하도록 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재량을 부여하고 있고, 적어도 법령이나 법률 문헌상 (피고에게) 작위 의무가 인정되기는 어려워 보이며, 국가인권위 권고 이후 시행령 개정 절차를 했다는 점에서 (원고 측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다"며 "피고가 꾸준히 장애인 복지정책을 수립·확대하고 3년마다 장애인 실태조사를 통해 장애인의 주요 요구사항을 파악하고 있는 등 장애인 접근권 확보를 위한 여러 정책을 시행했다"고 반박했다.
재판부 질의응답 시간에 오경미 대법관은 "일차적 이동수단인 대중교통 부분 등을 살펴봤을 때 장애인의 이동권 확보를 위해 피고가 많은 노력을 해온 것은 사실로 보인다"고 하면서도 "장애인차별금지법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동일한 사회활동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는데, 교통이동과 시설접근 사이에 불균형이 심하다"고 말했다. 이어 "교통수단을 통해 (장애인이) 이동을 했다면 그다음 편의점, 공연장, 도서관 등 시설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 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데 시설 접근 부분은 (지원이) 미약한 것 아니냐"고 꼬집었다.
원고 측 참고인으로 참석한 배융호 사단법인 한국환경건축연구원 이사는 "편의시설에 일단 들어가야 종업원을 만날 수 있고, 어떤 물건을 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데 아예 들어가질 못하니 종업원을 만날 수도 없다. (편의시설에) 들어가는 것만이라도 굉장히 중요하다"며 경험담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