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법원이 세계 1위 비철금속 제련기업인 고려아연 경영권을 둘러싼 MBK·영풍과 고려아연 간 가처분 공방에서 또다시 고려아연 측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자본시장법은 상장법인이 상법 제341조 제1항(자기주식의 취득)에 따라 이사회 결의로 자사주를 취득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며 "공개매수가 주총 결의를 거치지 않았다고 해서 자본시장법을 위반했다고 볼 수 없다"고 봤다.
그러면서 자사주 매입이 배임에 해당한다는 MBK·영풍 측 주장을 놓고 "매수한 자사주를 모두 소각하기로 한 이상 이를 업무상 배임행위로 단정할 수 없다"며 "경영상 분쟁이 있거나 선행 공개매수가 있었던 때에 자사주 취득을 금지하는 규정도 없는 만큼 공개매수 목적에 '경영권 방어'가 포함돼 있어도 위법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적대적 인수합병에 대응하는 방안으로서 대규모 자사주 취득은 그동안 국내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반면 미국·유럽 등에선 자사주 취득 후 소각이 적대적 인수합병에 대항해 경영권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미국 법원은 자사주 매입으로 매수가격이 높아지고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나더라도 주가가 매수가보다 높아지는 만큼 주주 이익에 부합한다는 것을 근거로 자사주 매입 후 소각을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인정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1985년 미국에서 일어난 유노칼 사건을 꼽을 수 있다. 당시 메사 페트롤리엄은 미국 석유기업 유노칼을 놓고 경영권 확보를 위해 공개매수를 선언했고 유노칼 이사회는 이에 대응해 메사 페트롤리엄을 뺀 나머지 주주를 상대로 자사주 매입을 결의한 바 있다.
메사 페트롤리엄이 자사를 제외하고 자사주 매입을 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금지 소송을 제기하자 미국 법원은 공개매수로 회사가 위협당한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있고, 이에 대응하기 위한 방어행위 정도가 합리적이면 '이사의 선관주의 의무'를 위반한 것이 아니라는 합리성·비례성 기준을 제시한 바 있다.
결과적으로 컬럼비아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한 바 있는 최 회장이 미국 판례를 한국 법원에서 재확인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됐다는 게 법조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적대적 인수합병에 대항해 자사주 매입을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선택하는 국내 기업들도 향후 급증할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법원 판단과 별개로 MBK·영풍과 고려아연 측 분쟁은 장기화를 예고하고 있다. MBK·영풍은 공개매수를 통해 지분율을 38.47%까지 끌어올렸고, 최 회장 측은 23일 공개매수가 끝나고 우호지분인 베인캐피털이 합류하면서 지분율을 36.49%가량 확보할 수 있을 전망이다. 장내 주식 추가 매입이나 자사주 교환을 통한 의결권 부활 등 주총에 대비한 양측 간 치열한 수싸움이 내년 3월 정기주총 전까지 이어질 것으로 예측된다.
고려아연은 법원이 가처분을 결정한 이후 "법원이 MBK·영풍 측 가처분 신청을 1차에 이어 2차에서도 기각하는 판결을 내린 것은 고려아연 자사주 매입의 불확실성을 높여 주주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하려는 꼼수"라며 "MBK·영풍의 공개매수보다 많은 확정이익에도 5% 넘는 주주들에게 인위적으로 재산상 손실을 끼쳤다는 점에서 시세조종과 자본시장 교란 행위에 대한 조사와 법적 처벌을 피해 가기 어려울 것"이라고 논평했다.
이에 MBK는 "자사주 매입이 2조7000억원 규모의 고려아연 차입금으로 이뤄지는 만큼 회사 재무구조가 훼손되고 남은 주주들도 피해를 볼 것이라는 본질에는 변함이 없다"며 "MBK·영풍은 의결권 지분 우위를 바탕으로 다른 주주와 협력해 고려아연 거버넌스를 바로 세우고 기업·주주가치 회복을 위해 노력할 것이며 공개매수 종료 후 임시주총 소집에 대한 입장을 밝히겠다"고 반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