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구 칼럼] K-서예의 새로운 길을 열다

2024-10-14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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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하진 서예전 '거침없이 쓴다'

이춘구 언론인
[이춘구 언론인]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노벨상 수상작가 한강의 시 <어느 늦은 저녁 나는>이다. 한강의 시를 접하게 된 곳은 푸른돌 취석 송하진 서예전이 열리는 전주현대미술관이다. 맞다. 여름날 포도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그려내는 포말을 보듯이 한강은 밥 공기 위로 피어오르는 김을 보며 찰나에서 영원으로 상념을 한다. 찰나가 영원이며 영원이 찰나이다. 돈오돈수(頓悟頓修). 송하진 작가도 한강처럼 부채꼴 둥그런 화선지 위에 한강의 시를 담았다. 마치 흰 공기 위로 김이 피어오르는 것을 공감하듯이.

송하진 서예전 이름은 「거침없이 쓴다」이다. 독자 여러분들이 잘 알다시피 송하진 서예가는 전북지사를 두 번 역임한 행정가이다. 「거침없이 쓴다」고 한 것은 40여 년의 공직생활의 엄격한 규율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마음의 표현으로 보인다. 또한 그가 잘 부르는 판소리 ‘사철가’ 가락처럼 풍류를 즐기며 붓을 놀게 하는 경지를 나타내는 듯하다. 거침이 없다 해서 격이 무너지는 게 아니라 거침없이 흐르는 붓의 흐름을 따라 천둥이 치고 구름이 흘러가며 바람이 부는 것이다. 성(聖)과 속(俗)이 나뉘어져 있는 게 아니다. 동서양이 서로 다르지 않으며, 세대를 초월하는 경지를 말한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이 「거침없이 쓴다」의 요지가 아닐까?

서예전의 소재는 동서양과 고대, 현대를 아우르고 있다. 우선 작가의 자작시 <어머니>를 비롯해 김소월, 한용운, 윤동주 등 여러 시인의 유명시가 눈에 띤다. 우리 글 한글로 된 것이기에 더욱 친근하며 어린아이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꿈틀꿈틀 출렁출렁 넘실넘실>이라는 한글 작품에서는 천지창조의 기운을 느끼며 천지운행의 법칙을 알게 하는 것 같다. 『훈민정음』과 <어부사시사>,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 원불교, 한시, 유명 경구 등도 수록하고 있다. <봄>에서는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일출>에서는 한 폭의 수묵화를 연출해낸다. 윤시내의 <열애> 가사인 ‘꽃처럼 영롱한 별처럼 찬란한’을 꽃처럼 별처럼 영롱하고 찬란하게 그려낸다.

송하진 작가는 조부 유재 송기면 선생의 <미·소의 국경분할>이라는 한시를 다시 살려내 분단상황에 대한 경각심도 일깨워준다. 유재 선생은 미·소 두 나라의 다툼이 가소롭기만 하다며 일찌감치 우려를 표명했다. 또 부친 강암 송성용 선생의 <조도망해(鳥島望海)>라는 한시를 요즘 말로 번역해 선비의 망중한의 정경을 전하고 있다. <대나무> 자작시는 대나무를 그리며, 21세기형 선비로서 마음을 다잡고자 하는 결기를 보여주고 있다. 조부로부터 이어지는 학문과 서예의 맥이 오늘날 한국 서단의 맥으로 이어지는 것은 두루 알려진 사실이다.

이번 서예전이 가능한 것은 작가의 한글에 대한 오랜 통찰을 바탕으로 서예로서 그 가능성을 오랫동안 연구한 덕으로 풀이할 수 있다. 평론가들은 그래서 이번 서예전을 「한국 서예의 새로운 길을 열다」라고 평가한다. 서예계 관계자들도 이에 대해 동의하는 모습이다. 작가는 「삶의 길과 서예의 한국성 추구」라는 서예론에서 “서예는 옛것을 새롭게 계승하면서 인문적 가치와 의미를 가진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해 순간적 일회적 운필로 행하는 추상적 형상의 문자예술이다.”고 정의를 내린다. 또한 앞으로 서예는 한국적 아름다움과 느낌을 속도감있게 추구하며, 한글이 주가 되는 서예를 하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미술평론가 장준석은 「붓 하나로 ‘和而不同 天眞의 세계’를 펼치다」라는 평론을 통해 송하진 작가는 다양한 서체를 연구하면서 특히 한국의 고유한 사상과 철학, 한국미 등 ‘한국성’에 큰 관심을 두었다고 평가했다. 이를 바탕으로 서예가로서 행정가로서 한국 서예의 활성화와 세계화 방안을 모색해 왔다고 설명했다. 즉 대중이 한자와 서체의 어려움으로 인해 서예를 멀리하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한글을 위주로 한 대중적인 서체를 창출하는 데 공력을 쏟았다고 분석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프랭크 아웃로 등 시대와 국적을 떠나 다양한 시와 글에 접근한 게 한국 서예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데 나침판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서예평론가 김병기도 「취석 송하진의 ‘거침없이 쓰는 서예’의 시대정신」이라는 평론에서 ‘거침없이 쓰는 서예’는 한국 서예가 구현해야 할 시대정신이고, 한국의 서예를 진흥하는 유력한 대안이며, 젊은이들에게 전통 서예를 알리는 대안이라고 강조했다. 김병기는 컴퓨터나 모바일 전화기의 단점을 극복하고, 순수예술로서 서예가 갖는 심오한 철학과 예술성을 교육시키며, 서예를 이용한 심리치료 프로그램과 웰빙 프로그램, 장수 프로그램 등을 개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중국이나 일본은 21세기에 서예가 갖는 의미와 가치를 재발견해 학교교육에 필수과목으로 지정하는 등 새로운 발전을 모색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작가 한강이 노벨상을 수상한 것은 산업사회에서 축적된 문화적 역량이 응축돼 발현된 것으로서 한국 문화사적으로 큰 사건이다. 우선 세계 최고의 한글을 가지고 있으며, 고구려시대부터 형성된 한류의 전통이 현대문화 전반에 걸쳐 인류를 선도하는 수준으로 올라선 것이 노벨상 수상으로 이어진 것이다. 한국 드라마로부터 시작된 한류 열풍이 BTS의 K-Pop, 한국 영화 등으로 확산되고, 그 생산자들의 역량이 크게 발전한 것이다. 한강 작가 부친인 한승원씨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느낀 점은 차분하고 이성적이라는 점이다. 「한국 서예의 새로운 길을 열다」를 통해 우리는 우리 글 한글의 우수성을 함께 공유하며 널리 전 세계에 알려 인류가 각성하기를 염원한다. 한국 서예는 세계인의 심성을 바르게 하며 인류문화를 꽃피우게 할 지름길이다. 한글 서예로 이어지는 새로운 한류시대를 열어가자.


이춘구 필자 주요 약력

△전 KBS 보도본부 기자△국민연금공단 감사△전 한국감사협회 부회장△전 한러대화(KRD) 언론사회분과위원회 위원△전 전라북도국제교류센터 전문 자문위원△전 한국공공기관감사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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