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통문화가 힙(hip)해졌다. 옷장에만 머물던 한복, 박물관에 보관된 유물, 어르신들의 종교로 여겨졌던 불교가 MZ세대(1981~2010년 출생)를 만나 하나의 놀이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MZ세대들은 전통문화의 희소성을 힙하게 재해석하며 각자의 개성을 표현하거나 신나게 즐기는 놀이로 변화시키고 있다.
옷장에서 나온 한복, 건담 로봇 옆 불교 개구리
결혼식 또는 명절에 꺼내 입던 한복이 일상으로 나왔다. MZ세대는 티셔츠에 한복 치마를 입거나 두건을 두르고 갓을 쓰는 등 한복을 현대적인 스타일로 재해석하고 있다. 한복이 특별한 날에만 입는 옷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옷차림이 된 것이다.
지난 9일부터 12일까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2024 한복상점’은 이러한 변화를 보여줬다. 한복상점을 방문한 젊은 층은 “한복은 나만의 개성을 표현하는 방식”이라고 입을 모았다.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대로 즐긴다는 것이다. 평소 생활한복을 즐겨 입는다는 김민경씨(29)는 “한복은 재미 그 자체다. 어느 순간 한복의 매력에 빠졌다”고 말했다.
뉴진스 등 K-팝 스타들이 한복을 입고 무대에 오르면서 해외에서도 관심이 커졌다. 한복상점 참가 업체 관계자는 “‘드레스는 식상하다’며 한복을 찾는 해외 고객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MZ세대의 또 다른 ‘픽’은 불교다. MZ세대가 뉴진 스님의 목탁 소리가 어우러진 EDM에 열광하자 대한불교조계종은 '청년들이여, 신나게 뛰어 보라'며 박람회를 통해 판을 깔아 줬다. 올해 4월 열린 ‘2024 서울국제불교박람회’ 전체 관람객 중 80%가 10~30대였다.
과거 불교박람회는 50·60대 불자들이 주요 관람객이었기 때문에 고풍스러운 전시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조계종은 달라졌다. MZ세대를 위해 힙한 이벤트를 비롯해 AI부처와 일문일답 등 독특한 콘텐츠를 마련했고, 올해 박람회는 ‘천주교 신자도 반차 써서 가는 문화 행사’라는 명성을 얻었다. 더구나 불안 사회에서 고민을 털어놓을 곳 없던 젊은이들은 ‘출가상담 부스’에서 스님과 대화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초콜릿 붓다, 자빠진 쥐, 불교 개구리 등 이색 불교 굿즈도 인기를 끌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이용자들은 “굿즈 매진이다. 중생아, 너무 늦었느니라”며 유머 섞인 정보를 공유하기도 했다. 합장하는 개구리인 불교 개구리를 ‘건담 로봇 옆에 뒀다’는 어느 블로거의 글처럼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불교와 MZ세대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불교가 젊은 세대와 소통하는 것은 노래와 춤으로 대중에 불교를 전파했던 원효대사의 뜻과 닿아 있다. 조계종 관계자는 “불교에는 각자 관심에 맞게 다양하게 안내하는 '방편'이 있다”며 ‘재미있는 불교’ 또한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낙산사는 서핑 템플스테이를 통해 여름휴가를 보내며 평정심을 찾는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등 불교계가 청년들에게 숨통을 틔워주고 있다.
“유물을 내 손에”···굿즈, 박물관 인지도로
박물관도 MZ세대와 통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을 바탕으로 만든 굿즈인 뮷즈(뮤지엄+굿즈)는 SNS 등에서 입소문이 나며 대박을 터뜨렸다. 형형색색의 반가사유상 미니어처를 비롯해 백제금동대향로 미니어처, 취객선비 3인방 변색잔 세트 등이 완판 행진을 기록했다. 할머니 장롱으로 통했던 자개로 만든 스마트폰 케이스 등 감각적인 굿즈들이 연이어 출시되자 젊은 층 발길이 박물관으로 향했다.
그 결과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 37억6100만원으로 쪼그라들었던 국립박물관 상품 매출액은 지난해 149억7600만원으로 수직 상승했다. 올해 상반기 매출에서 20·30대 비중은 57%에 달했다.
국립박물관 상품을 기획하는 김미경 국립박물관문화재단 상품기획팀장은 “기성세대와 달리 젊은 세대에게는 전통이 접해보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콘텐츠”라며 “이러한 희소성을 비롯해 역사적 의미가 있는 보물을 뮷즈로 대신 소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MZ세대는 오래된 콘텐츠를 활용한 상품이더라도 디자인이 트렌디하고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품목들을 좋아한다”며 “실용성, 매력적인 디자인, 그 속에 숨은 귀한 콘텐츠 등 삼박자를 갖춰야 젊은 세대에게 어필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박물관 굿즈는 해외에 문화유산을 홍보하는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국가유산진흥원은 2024 파리올림픽을 계기로 파리에서 이달 말까지 ‘한국의 색’을 주제로 오얏꽃 오일램프 등 국가유산을 활용한 문화상품 20여 종을 선보이며 현지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국립박물관문화재단 역시 뮷즈의 영문 홈페이지를 재정비해 온라인 숍에 대한 해외 접근성을 높이고, 미국 덴버미술관 등 우리 문화유산의 해외 박물관 전시 개최에 맞춰서 이들 유물과 연계한 상품을 소개하는 방안을 협의 중이다.
일본·중국도 MZ 잡아라···일각에서는 비판도
전통의 원형 보존을 중시해 온 아시아 각국에서도 젊은 층을 잡기 위한 변화가 일고 있다. 일본에서는 전통연극 가부키를 메타버스로 상연하거나 틱톡 쇼츠에 익숙한 젊은 관객들 성향에 맞춰 상영시간을 대폭 줄이고 대사를 현대화하는 추세다. 도쿄국립박물관은 박물관이 소장한 국보 89점과 중요문화재 694점 등 소장품 약 12만점을 활용해 지난 20년간 약 2200개에 달하는 굿즈를 선보였다. 나가노에 있는 호쿠사이칸 박물관은 굿즈 매장 매출이 박물관 입장료 수입 가운데 70%에 달하는 등 굿즈 판매는 박물관 운영에 버팀목이 되고 있다.
중국에서도 박물관들이 갑골문자 등 유물을 활용한 디지털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선보인 결과 지난해 박물관 입장권 구매자 중 2000년대 출생자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어 1980년대생과 1990년대생이 각각 뒤를 이었다.
물론 전통문화의 변형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궁궐 일대 한복이 ‘국적 불명’이란 지적은 끊이지 않는다. 올림픽 기간 전 세계적으로 극찬을 받은 전통의상을 기반으로 한 몽골 국가대표팀 단복 역시 자국 내에서는 “중국의 만주족 전통의상에 가깝다”며 질타의 대상이 됐다.
이와 관련해 김미경 팀장은 “힙트래디션이라는 새로운 현상은 우리 전통문화를 새롭게 보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면서도 “변형의 과정에서 유물이 가진 고유의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고, 근본적 가치가 흔들리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이 중요 포인트이자 어려운 지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