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더운 여름, 집 밖으로 나가기조차 힘겹지만 ‘여행을 통해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던 지인의 꾐에 한번 넘어가 보기로 한다. 우리만의 값진 여행으로 갑진년 무더위를 떨쳐내야겠다.
◆‘P’들의 우왕좌왕 강화 나들이 스타트
그와는 몇 달 전 행사장에서 처음 조우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몇몇이 즉석에서 나들이를 계획했고, 최근 강화도(인천)로 나들이를 다녀왔다. 목적지 외엔 아무것도 정한 것 없는, 이른바 'P'들의 '무계획' 나들이였다.
기자는 물론 기자와 친한 대다수 사람은 'P(인식)'다. 최다니엘도 그렇다. 성격유형지표(MBTI)에서는 조금은 즉흥적인 성향을 띠는 사람들을 ‘P’로 분류한다. P는 체계적이고 세밀한 계획보다는 자율적인 방법을 추구한다. 또 결론보다 과정을 즐긴다. 어찌 보면 '즉흥적'이고 '무계획적'인 이들이 P형 인간에 속한다. 'P'들이 모였으니 목적지라도 정한 것이 다행이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나들이 전날까지 '어디서 만날지' 이야기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일행 중 유일한 'J(판단형)'인 지인이 답답했던지 “우리 내일 강화 여행 떠나는 것이 맞냐”고 채근했다.
그제야 휴대폰 검색을 마친 듯한 누군가가 “오전 9시 30분까지 도레도레 강화점으로 오라”며 “일단 여기 모여 목부터 축이면서 생각하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첫 번째 목적지가 정해졌다.
◆자연과 건축물의 조화···내 맘에 켜진 '그린라이트'
여행 당일 아침 강화 초입을 지나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물고 다시 고불고불한 길을 오르니 도레도레 강화점이 등장했다.
도레도레 강화점은 요즘 강화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곳이다. 소위 인증샷 열풍이 부는 지금 더더욱 그렇다. 여름철 이곳은 수국이 한창이라 디저트 맛집인 동시에 수국 맛집으로 입소문이 났다. 그 덕에 주중 주말 할 것 없이 많은 이가 도레도레 강화점을 찾는다.
이곳은 ‘도레 빌리지’로 통한다. 흡사 하나의 마을 같다. 김경하 도레컴퍼니 대표의 가족이 거주하던 집 바로 옆 부지에 2013년 도레도레를 오픈했고, 2017년 마호가니 커피를, 2021년 셀 로스터스를 오픈했다.
드넓은 부지에 들어선 건물 곳곳을 모두 방문하고, 야외에서 천천히 경관을 즐기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특히 여름의 도레 빌리지는 온통 수국 세상이다. 정원과 수국은 김 대표 부모님의 작품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김 대표 가족의 땀과 정성이 스미지 않은 것이 없다. 김 대표의 부모님은 20여 년간 손수 정원을 가꿨다.
올봄 샤스타데이지가 장식했던 자리를 가득 채운 미색의 수국 이름은 ‘그린라이트’다. ‘썸’을 타는 남녀가 이 수국길을 걸으면 이들의 연애에 ‘그린라이트’가 켜질 것만 같다.
도레 빌리지의 아름다움에 정점을 찍은 것은 ‘수상(受賞)’한 건물들이다. 도레도레 강화점은 2014년에 인천시건축문화상을, 셀 로스터스는 2022년 인천시건축상 ‘대상’을 받았다.
김 대표는 스마트팜과 스테이(숙소)를 추가로 조성해 도레 빌리지를 완성하는 것이 목표다.
마침 이곳에 방문한 도레 빌리지 설계자인 구영민 건축가를 만날 수 있었다.
구 건축가는 “건물들이 자연에 숨어 있다. 건물이 자연을 비집고 나와 도드라지면 안 된다”며“ 이곳에 들어온 순간 또 다른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대신 건물 안에서 바라본 풍경이 제각각인 점도 이곳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경청하던 최다니엘이 “건물 외관은 각진 반면 내부에 활용한 기둥은 노출 콘크리트인 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고 넌지시 이야기했다. 그러자 구 건축가는 “배우라 섬세한 것 같다. 본인보다 (배우가) 더 건축가 같다”며 웃어 보였다.
평소 여행을 즐기진 않지만 시장을 찾거나 주민들 일상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최다니엘은 도레 빌리지에 무척 만족하는 눈치였다.
“와, 강화에 이런 곳이 있는지 몰랐어요. 강화는 촬영차 교동만 한 번 가봤거든요. 커피와 케이크의 맛, 경관, 건물까지 모든 것이 아름답네요, 수국길도 예쁘고요.”
◆세월의 더께 켜켜이···3대가 빚은 금풍양조장
“이제 어디로 가지?”
역시나 다음 여정에 대한 계획은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을 시작하려는 찰나, 일행 중 한 명이 넌지시 “근처에 양조장이 있다더라”고 귀띔했고 말을 마치자마자 모든 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두 번째 목적지는 ‘금풍양조장’.
강화도에서도 ‘좋은 기운’이 깃들었다는 길상면, 그중에서도 물 좋기로 소문난 동네 온수리에 자리한 금풍양조장은 1931년부터 터를 잡고 막걸리를 빚어왔다. 지금의 양조장은 주인장의 조부 양환탁씨가 1969년 인수했고, 지금까지 3대째 운영 중이다.
입구로 들어가니 양조장을 지키는 강아지 한 마리가 꼬리를 살랑이며 다가온다. 이름은 금풍이, 직책은 ‘상무’다.
금풍이의 안내에 따라 100년 역사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금풍양조장에서 판매하는 막걸리들을 비롯해 술지게미로 만든 인센스와 향초, 메시지 카드, 술잔, 금풍이 모티프 굿즈들까지 여행자의 구매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양태석 금풍양조장 대표가 직접 나와 다양한 막걸리를 맛보여 주었다. 금풍양조 막걸리는 강화에서 수확한 무농약 친환경 쌀을 이용해 빚고 감미료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막걸리는 금풍양조, 금학탁주 블랙‧그린‧골드 등 네 가지로 나뉜다. 탄산을 덜어내 자극적이지 않고 조금 더 부드러운 감각이 혀끝에 감기는 것이 퍽 매력적이었다.
시음 후 삐걱대는 계단을 천천히 올라 2층에 다다랐다. 1층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마치 1930년대로 타임슬립한 듯 100년 된 커다란 술항아리와 술 재료를 놓아두었던 판자, 국실로 재료를 내려보내던 바닥 통로 등 양조장 100년 역사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금풍양조장은 2022년 인천시 등록문화재(등록문화유산)로 등재됐다. 2023년에는 인천시와 인천관광공사가 선정한 ‘인천 웰니스 관광지’에도 이름을 올렸다.
금풍양조장에선 막걸리 빚기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막걸리 시음과 전시장 투어, 막걸리 빚기 순으로 구성됐다. 강화 약쑥을 활용해 차를 만드는 '차완'과 협력해 집에서도 쉽게 만들 수 있는 막걸리 밀키트도 판매한다.
우리는 2층에서 찍은 즉석 사진 한 장을 출력해 한 손에 들고 나와 입구 현판 아래에서 또 한 번 인증사진을 찍으며 여행 추억을 새겼다.
◆일상 잠시 멈추고 5분 명상···지친 영혼 달래는 시간
세 번째 목적지는 '동검도 채플 갤러리'다. 강화 남단 작은 섬, 동검도에 자리한 하얀 오각형 건물은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동검도 채플을 지은 사람은 스테인드글라스(유리화) 작가이자 천주교 사제인 조광호 신부다. 조광호 신부는 “일상에 지친 이들이 잠시 멈춰 5분이라도 명상하고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 공간을 짓게 됐다”고 말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할 즈음 채플 안으로 들어가 잠시 명상에 잠겼다. 명상을 하다 올려다본 유리화의 색감이 하늘빛과 어우러져 퍽 오묘했다.
채플 바로 앞 갤러리에는 넓지 않은 공간에 조 신부의 생각이 반영된 작품이 다양하게 걸려 있다. 2층은 실제 미사가 열리는 예배당으로 활용된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옥 성당인 ‘온수리 성공회’도 길상면에 자리한다. 목조 건물에 전통 기와지붕인 팔작지붕을 얹은 외관, 서유럽 교회의 건축 양식을 엿볼 수 있는 내부가 인상적이다.
현재 본당은 보존을 위해 전시공간으로만 운영하고 있다. 이곳은 그 역사성과 건축미를 인정받아 인천시 유형문화재(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됐다. 실제 미사는 한옥 성당 옆 주황색 벽돌로 지어진 신식 건축물에서 진행된다.
나들이 내내 최다니엘 입가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귀 기울여 듣고, 궁금한 점을 묻고, 본인 생각을 전하는 그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우리는 수증기를 가득 머금은 여름의 공기도 개의치 않고 강화의 곳곳을 다녔다. 강화엔 낭만이 내려앉았고, 폐부엔 행복이 스몄다. 계획 없이 떠난 당일치기 즉흥 여행에 대한 느낌을 묻는다면 거침없이 답하리라. “여행 목적지도, 여행 메이트도, 두런두런 나눴던 이야기도 모든 것이 완벽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