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金正恩, 1984년 1월 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 지도자는 28세에 세계 최연소로 집권, 12년째 권좌를 유지하며 불혹(不惑)의 장년(壯年)인 40세가 되었다. 어린 나이에 ‘준비 없는 불안정한 리더십’으로 체제유지가 힘들 것이라는 국내외 전망이 무색하게 ‘권불(權不) 10년’을 넘어 유일 영도체제를 확립, ‘총’으로 철권통치를 하고 있다.
모택동의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힘의 논리’를 신봉한 김정일은 17년간 북한을 ‘총’을 통한 무력통치로 선군(先軍) 경제 노선을 관철시켰다. 김정은도 대를 이어 대남 무력적화통일이란 목표하에 ‘선군 지향’의 유훈(遺訓)통치를 근간으로 경제-핵병진 노선을 국가전략으로 채택했다. 그는 근년 핵 무력을 바탕으로 선대 숙원이었던 통일과업 완수를 국시로 설정하고 호시탐탐 ‘남조선’ 점령기회를 노리고 있다.
김정은은 2010년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으로 정치에 참여, 후계자로 영향력이 커지면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선친 김정일
국방위원장(2011년 12월 17일 사망) 사후 대권을 갑자기 승계한 그는 2주 뒤 2011년 12월 29일 김정일 추도대회에서 영도자로 선포됐다. 다음 날 3대 세습으로 당 정치국 회의에서 북한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되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가 되었다.
이듬해인 2012년 4월 11일 조선로동당 대표자 회의에서 노동당 제1비서, 이틀 뒤인 13일 최고 인민 회의에서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어 김정일 직책을 모두 세습해 12년째 최고 존엄으로 군림하고 있다.
김정은은 김정일의 세 번째 부인인 고용희와의 사이에서 2남 1녀 중 차남으로 강원도 원산시 송천동 원산에서 태어났다. 재일교포 출신인 고용희는 평양 음악무용종합대에서 무용을 전공, 1972년 만수대예술단원이 된 뒤 김정일이 주말에 여는 파티에서 김정일 눈에 들어 1979년 창광산 관저 안주인이 되었다. 그녀는 김정일 총애를 받은 셋째 부인으로 김정철 김정은과 김여정을 낳으며 퍼스트레이디 자리를 굳혔다.
고용희는 백두혈통 서열에서 정실부인 소생인 김정남에 이어 셋째 아들로 후계구도에서 밀리는 처지였던 김정은을 ‘최고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제왕학 교육’을 염두에 두고, 일찍이 해외로 유학시킨 뒤 강하게 키운다며 빡센 군 생활을 시킨 것으로 알려진다. 김정일 최측근 인물들에게도 은덕을 베풀며 ‘김정은 세자책봉’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아들의 등극을 보지 못하고 유방암으로 2004년 프랑스에서 세상을 떴다.
학창시절 ‘박운(박은)’(Pak Un)이라는 가명으로 통한 김은 어머니 뜻에 따라 프랑스를 거쳐 16세 때 스위스에 유학, 베른 근교 리베펠트-슈타인횔츨리 공립학교에서 김나지움(Gymnasium, 일반계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그는 학교 기록에 따르면 중학교 인근의 한 초등학교에서 독일어 보충학습을 받은 뒤 1998년 8월에 7학년(한국의 중학교 1학년 해당)으로 편입, 9학년이던 2000년 말 학교를 그만뒀다. 당시 담임이었던 시모네 쿤은 일본 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 인터뷰에서 “그가 점심시간에 교무실로 와서 ‘내일 귀국한다’고 말한 뒤, 다음날부터 나오지 않았다”고 전했다.
김정은은 귀국 뒤, 2000년대 중반부터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 아버지 김정일과 권력 수뇌부 주변의 시선을 끌기 시작했다. 2004년에는 부모 권유로 조선인민군에서 하전사로 입대, 1년 6개월 동안 군 복무를 한 뒤 하전사에서 곧바로 중장으로 진급했다.
김정일이 자신의 후계자로 김정은 지명을 중국에 알린 시점은 2009년 3~4월 전후. 김정일은 자신의 사후를 염두에 두고 자신을 대신해 엘리트들을 감시하는 중책인 국가 안전보위부장에 임명, 정권을 확고하게 장악할 수 있도록 포석했다.
당시 국내 대북 전문가와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도 김정은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 등을 들며 후계자 지명설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2010년 9월 27일 조선인민군 대장 임명, 다음날 3차 노동당 대표 회의에서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 및 당 중앙위원 임명 절차를 거치며 김정은은 북조선의 국가통치권 후계자로 공식 확정되었다.
2000년대 중후반부터 당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그는 이로써 실질적인 후계자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조부 김일성이 김형직의 장남이고, 선친 김정일 역시 김일성의 장남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장자 승계 원칙’을 깨고 3남임에도 불구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 지도자에 취임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김정일은 김일성 후계를 둘러싼 암투가 치열한 가운데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직계는 ‘원가지’, 방계는 ‘곁가지’로 규정하는 프레임을 씌워 정적들을 제거했다. 원가지는 김일성 김정숙 사이의 장남인 김정일로 이어지는 적장자(嫡長子). 김일성 장남으로 직계인 자신에게 백두혈통을 잇는 정통성이 있다며 4년여 치열한 소위 ‘혈통’ 투쟁을 벌인 끝에 삼촌 김영주와 이복동생을 ‘곁가지’로 몰아 제거한 것이다.
그는 전통적으로 정실(正室)부인이 낳은 자식 중 맏아들이 승계하는 불문율을 명분으로 1974년 2월, 북한 당 중앙위원회 5기 8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 후계자로 공식 승계했다. 집권 뒤 계모 김성애와 이복동생 김평일 김영일을 모두 ‘곁가지’로 분류, 철저히 견제했다.
북한도 유교적인 장자 상속사회라는 사회구조와 정서가 남아있어 한때 김정일 사후 맏아들인 김정남(金正男, 1971년 5월 10일 ~ 2017년 2월 13일)이 후계구도에서 가장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일성도 원가지인 종손(宗孫) 김정남을 총애, 후계구도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유력한 후계자로 여겨지던 김정남은 조선 컴퓨터중앙위원회 위원장, 1997년 12월 주캄보디아 전권대사, 1998년 3월 국가 안전보위부 제1차장을 역임하는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스위스에 유학, 자유 세계를 경험한 그는 서구식 민주주의로의 개혁을 거론할 정도로 자유분방한 개방적 성격이었다.
2002년 국가 예산 횡령 혐의로 좌천된 장성택을 결정적으로 구해준 ‘김정남 어머니 성혜림’의 음덕으로 장성택은 김정일 후계자로 김정남을 옹립하고 나섰다. 그러나 권력 핵심 요직에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임명, 김정일 시대 2인자로 ‘킹메이커’역을 자임했던 장성택이 지원하며 보살펴온 김정남을 버리고 ‘어리고 만만한’ 3남 김정은을 지지하면서 후계구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김정남은 2001년 도미니카 위조 여권으로 일본에 밀입국을 시도하다 추방되어 김정일의 분노를 샀고, 후계구도에서 밀려났다. 차남 김정철은 내성적인 성격으로 유약하고 무능력해 부하들을 휘어잡지 못한다는 이유로 배제되면서 김정일 사후 자연스럽게 권좌가 3남인 김정은에게 넘어간 것이다.
김정은은 김정일 아들 중에서 막내임에도 불구하고 두 형에 비해 성격이 억세고 조직 장악력을 평가받아 형들을 제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 지도자에 올랐다. 전통적인 장자(長子) 우선 사회에서 3남으로 후계자가 된 인물은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세종대왕이나 재벌기업 삼성에서 3남인 이건희 회장이 승계한 사례는 이를 증명한다.
후계자 옹립 과정에서 북 수뇌부는 김정은을 포병 전문가로 미화, 영도자 자질을 부각시켰다.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철저한 계획에 따른 공격으로 김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한 공작이었다. 일본 아사히 신문(朝日新聞)은 12월 1일 북측 소식통을 인용, “김정은의 이름으로 지난달 초 ‘적의 도발 행위에 언제라도 반격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라’는 지령이 북한군 간부들에게 하달됐다”고 보도, 그의 업적을 극대화해 김정은 후계구도를 확실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되었다.
갑작스러운 권력 이양과 통치력의 미숙, 핵 개발 집중과 최고위층 무분별한 숙청 등 폭력성이 부각되면서 정권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유엔 등 국제적인 제재 속에서도 건재하고, 심각한 경제난에도 독재적인 철권통치로 권력은 안정됐다는 평가다.
권력 행사에 거추장스러운 선대의 참모들은 물론 자신의 후계자 옹립에 결정적 역할을 한 후견인이자 ‘킹메이커’인 고모부 장성택(2013.12.12.)과 한때 후계자로 거론되던 이복형 김정남(2017.2.13.)까지 숙청, 공포통치로 1인 집권체제를 거의 완벽하게 구축한 것이다.
김정은은 권력의 걸림돌이 될만한 측근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조선 태종 이방원에 비유된다. 이방원은 장자인 양녕대군을 폐세자하고, 이복동생 이방석과 이방번을 척살, 창업 공신 이숙번도 삭탈관직했다. 외척(外戚) 발호를 막는다며 창업 공신이라 할 자신의 처남(민무질과 민무구)을 사사(賜死)했으며 사돈인 세종대왕 장인 심온은 자진(自盡:스스로 자결)하게 했다. 왕권과 후대를 위해서라면 부인과 며느리 집안도 ‘멸문지화’(滅門之禍)에 몰아넣을 수 있는 비정한 군주였다. 조선 왕조 최고의 시대로 평가받는 세종 시대는 이방원이 악역(惡役)을 맡은 사전 정지작업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가능성이 크다.
국가는 물론 대기업도 부불삼대(富不三代) 즉 ‘3대 가는 부자가 없다’는 말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1대가 일군 창업 자산이 3대까지 지속하는 사례가 흔치 않다. 3대를 못 넘기고 멸망한 강성제국 진나라의 흥망성쇠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역사상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B.C. 259 ~ B.C. 210, 재위 B.C. 247 ~ B.C. 210)은 13살에 진나라의 왕이 된 뒤 집권 26년째 해인 기원전 221년 중국을 최초로 통일, 전제주의적 중앙집권제의 강성대국 진(秦)나라를 창업, 시황제(始皇帝)로 군림했다. 군현제(郡縣制)에 의한 중앙 집권을 확립하고,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일으켜 사상을 통제하는 한편 도량형과 화폐를 통일시켰다. 시황제가 지방 순시중 50세에 갑자기 죽자 전국은 반란으로 분할되고, 무능한 2세 황제 호해(胡亥)에 이은 진왕 자영 대에 이르러 진시황 사후 5년, 3대 15년 만에 멸망했다.
진 제국은 급진적인 통일 정책, 무거운 세금, 가혹한 형벌을 통한 철권통치와 대규모의 토목 사업에 따르는 국민 생활의 불안 등으로 민심이 정권을 떠나 반란이 일어나 멸망한 것이다. 진시황은 폭정을 통해 사상의 통일을 이루려고 했지만, 민심은 정반대였다.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진나라 멸망은 “진시황은 천성이 고집불통으로 남의 의견을 듣지 않았다.”며 ‘정보와 소통’을 외면, 덕정(德政)을 펴지 못한 것을 가장 큰 이유로 지적했다. 2100년 전 사마천은 망국 요인으로 ‘지도자의 오만(傲慢)’을 지적, ‘마음의 귀를 열어놓지 않으면 처참하게 실패’한다며 소통문제를 중시한 것이다.
“충성을 다하여 황제의 잘못을 막지 못했던 이유는 진나라에 꺼리고 피해야 할 습속이 많아 충성 어린 충고를 하는 사람은 말도 끝내기 전에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천하의 뜻있는 지식인들은 듣기만 하고, 두 다리를 모은 채 입을 다물었다. 이 때문에 임금이 바른 도리를 잃었는데도 신하들은 솔직하게 충고하지 못했다. 지혜롭다는 지식인들은 묘책을 내지 못했다. 천하가 어지러워진 다음에도 황제(2대 황제 호혜)는 이런 일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니 이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사마천, <진시황 본기>)
북한은 군사적으로 6차 핵실험으로 세계에서 10번째로 50여 기의 핵탄두(추정)를 확보해 핵 무력을 완성하고, 2017년 11월 29일 장거리 탄도미사일 화성 15형 시험발사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선대에도 하지 못한 세계 최강국인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의 회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24년 만의 북한 방문 등 그의 리더십은 내우외환(內憂外患)의 불안 속에서도 북한 처지에서는 상당한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데도 방북한 푸틴과 국내외 압박으로 체제위기에 처한 김정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지난 6월 19일
서명한 새로운 ‘포괄적 전략 동반자 협정’에는 유사시 자동 군사개입 조항이 포함됐다. 회담 뒤 푸틴은 “포괄적 동반자 협정은 무엇보다도 협정 당사자 중 한쪽이 침략당하면 상호 지원을 제공한다”고 말해 이번 방북을 기점으로, 양국이 군사적인 협력 관계를 넘어 소련 시절의 동맹 관계를 복원할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중국보다 북-러의 밀착은 소련의 승인하에 발발한 6·25 전야를 연상시키는 불길한 조짐이다. 올들어 군부대를 집중적으로 찾아 현지 지도하는 가운데 조선조와 일제 말기의 연장선에 있는 ‘김일성 왕조체제’는 심각한 구조적 모순으로 생존 위기에 처해 있다. 스마트폰 700여 만대 보급 등 디지털시대 만개(滿開)로 정보통제가 힘들고 ‘장마당 세대’로 상징되는 알파 세대 청소년들의 의식변화, 심각한 식량난 등으로 3만여 명의 탈북자가 양산되면서 북한 붕괴시나리오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과거 왕조시대에도 폭군이나 암군(暗君) 시대에 간신이나 중상 모략배들이 설치는 것을 비판한 공자는 정치적 비전을 논한 태백
편에서 “지배자가 포악하고 아부배들이 날뛰며 도덕이 행방불명된 나라라면 군자가 안주할 땅이 아니니 탈출하라”고 하였다.(危邦不入, 亂邦不居) 만일 탈출이 불가능하다면 우둔함을 가장하는 자위(自衛)전략을 세워야 할 것이라고 권하였다.(논어 태백편 卷8)
어린 나이에 집권, 10여 년 만에 강대국 정상들과 맞서는 스트롱맨이 되어 철권통치를 계속하고 있는 김정은의 제왕적 통치술은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의 정치 지형의 최대 변수로 등장, 청출어람(靑出於藍)이 될지 호부견자(虎父犬子)로 귀결될지 전 세계가 그를 주목하고 있다. 3대 세습한 그가 갖은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겪으며 나름대로 12년째 조부가 창업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체제 수호에 성공했지만, 국내외에서 목을 조여오는 위기의 기로에서 어떻게 수성(守城)해 낼지 지켜볼 일이다.
박종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철학과 ▷중앙대 정치학 박사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EBS 이사 ▷연합통신 이사 ▷언론중재위원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