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을 기점으로 아역 배우 아닌 주연 배우로 성장한 그는 영화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내 심장을 쏴라' '대립군', 드라마 '왕이 된 남자' '호텔 델루나' 등으로 자리 잡았고 다양한 장르와 캐릭터로 필모그래피를 채웠다.
정통 사극부터 현대극, 스릴러, 판타지, 멜로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활약해 왔으니, 여진구에게 더는 새로운 얼굴을 볼 수 있을까 남몰래 짐작했었다. 그러나 영화 '하이재킹'(감독 김성한)은 단박에 그 편견을 깨부쉈다. 20여년째 브라운관과 스크린에서 만나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진구의 '낯선 얼굴'이 있었다. 악에 받쳐 모든 걸 내던지려는 '용대'는 지금까지 우리가 봐왔던 위태로운 소년의 면면이 아니었다. 여진구는 '용대'를 통해 또 다른 영역을 개척했고 새로운 장르와 캐릭터로 확장해 나갔다. 앞으로의 20년까지 기대해 봄 직한 성과였다.
"매 작품 진심으로 찍고 있어서 (공개를 앞두고 있을 때는) 늘 긴장하고 있어요. 한순간도 편안해지지 않아요. 그런데 영화 '하이재킹'은 조금 더 떨렸어요. '왜 이렇게 긴장하지!' 싶을 정도더라고요."
영화 '하이재킹'은 1971년 대한민국 상공, 여객기가 공중 납치되면서 벌어지는 극한의 상황을 담고 있다. 극 중 여진구는 여객기 납치범 '용대' 역을 맡았다. 6·25 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 장교가 된 형 때문에 극심한 차별과 괄시를 받으며 살아온 그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복역 후 집으로 돌아왔지만 어머니까지 죽어버리자 북한으로 넘어가겠다는 결심을 하는 캐릭터다.
"저의 연기적 도전에 대한 만족감은 사실 잘 모르겠어요. 다만 현장에서 느꼈던 만족감은 앞으로 저의 배우 생활에도 도움을 줄 것 같아요. 어떤 답을 찾은 기분이 들었거든요. 늘 유쾌한 현장이었고 배우들도 그런 현장을 사랑하는 게 느껴졌어요. 진지한 고찰과 고민을 나누면서도 그 유쾌함을 잃지 않는다는 게 새로웠어요. 서로 치밀하게 계산하고 주고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가면서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내놓았다고 생각해요. 이번 현장에서 선배들을 통해 많은 점을 배웠고 '앞으로 이런 현장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이 일을 업으로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작품입니다."
여진구는 영화 '하이재킹'의 부기장 '태인' 역을 맡은 하정우의 추천을 받아 시나리오를 읽게 되었다. tvN 예능 프로그램 '두 발로 티켓팅' 촬영차 해외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였다.
"시나리오를 읽고 그냥 궁금해졌어요. '용대'의 과거가 설명되어 있었지만, 그의 감정은 배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시나리오를 읽으며 의문이 많이 생겼어요. 저는 배우이고 '용대' 역으로 제안받은 거였으니까. 이런저런 상상을 하고 감정에 대해 추측해 보면서 읽게 되더라고요. '이 친구는 왜 이렇게 에너지가 강할까' 그런 점들이 궁금했어요. 감독님에게 여쭤보고 싶은 게 많았고 미팅으로까지 이어졌죠. '용대'라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실제 인물에서 따온 부분들도 있지만 감정적으로는 배제되어 있어서 제가 오히려 집중할 부분이 많을 거로 생각했어요. 배우로서 호기심이 들었고 제가 하지 않았던 역할에 대한 힘을 느꼈죠. 그게 출연 결심으로까지 이어진 거예요."
여진구는 여객기 납치범인 '용대'에게 어떤 서사도 주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실제 '용대'의 모티브가 된 인물을 토대로 캐릭터를 만들었지만, 최대한 서사가 주어지지 않아야 했다. 명백히 피해자가 있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납치범에 대한 기사가 있었어요. 그걸 토대로 과거를 만들었고 연기나 구체적인 캐릭터는 감독님과 대화하면서 구체화했어요. 감독님께서 어떤 영화 속 인물들을 알려주시며 레퍼런스로 삼으라고 하긴 했지만 그건 힌트에 가까웠어요. 상황이나 감정에 대한 거였죠."
배우 여진구에게 '서사'를 배제하라니. 어려운 일처럼 느껴졌다. "이미 눈에 서사가 가득하지 않으냐"고 말을 건네자 "몰입되는 순간은 있었지만, 너무 몰입했다가는 캐릭터를 정당화하게 될 것 같았다"며 멋쩍게 답했다.
"그런 시선을 가지고 작업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 과정에서 '용대'가 보여줘야 하는 감정선이 있어서 그 안에서 다양한 시도를 해보았어요. 감정을 더 넣어보고 덜어내도 보고 의미심장하게도 담아보고요. 여러 시도를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만족감이 높아요."
영화 '하이재킹'은 여객기라는 한정적인 공간 안에서 이야기를 끌어간다. 특히 '용대'는 위압적인 태도를 드러내거나 몸싸움을 벌이는 등 역동적인 면모들을 드러내야 했다.
"좁은 데서 부딪치면 부딪치는 대로 거칠게 (액션을) 담았어요. 가벼운 타박상은 늘 있었지만, 영화 후반에 (하)정우 형과 몸싸움을 벌이는 건 합을 맞추지 않으면 위험했어요. 제가 이렇게 격한 감정을 끌어내서 몸싸움을 벌이는 캐릭터는 처음 맡아봐서 감정 컨트롤이 안 되는 거예요. 리허설 때보다 더 격하게 연기하고 더 가깝게 다가가고 하면서 자꾸 접촉이 벌어져서 힘들었어요. 충분히 마음을 다스려도 현장에 가면 컨트롤이 안 되더라고요. 선배님들께서 충분히 제 마음을 이해해 주시고 컨트롤하는 방법을 알려주셔서 도움을 받았어요. 정우 형께서 '네가 몰입되어 있는 건 보기 좋지만, 이 기회에 감정 컨트롤할 수 있는 법도 배우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새로운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였던 것 같아요."
한정적인 공간에서 펼치는 액션 연기다 보니 '합'이 중요했던 터. "즉흥적인 연기를 선보이긴 어려웠겠다"고 하니 "몸으로 하는 건 쉽지 않았다"고 답했다.
"애드리브보다 리허설하면서 아이디어를 많이 내고 여러 번 체크하는 식이었어요. 계획에 없었어도 아이디어를 내면 그에 따라 체크하고 연습을 거듭해서 촬영에 돌입했어요. 이런 과정이 좋았던 것 같아요."
벌써 데뷔 20년 차다. 여진구는 짧지 않은 연기 경력을 돌아보며 "슬럼프도 있었고 스스로 몰아붙이던 때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스스로 힘들게 하는 편이었어요. 많이 외면하고 안 좋은 곳으로 몰고 가곤 했죠. 제게 연기는 흥미로운 '놀이' 같은 일이었거든요. 그런데 정말 감사하게도 좋은 기회들을 얻고 성장할 수 있게 되었고 더 큰 꿈을 가지게 되었어요. 이제 막 '꿈'을 펼치려 할 때 생각지도 못한 큰 사랑을 받았잖아요. 큰 행운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얼마나 큰 책임감과 무게감을 가져야 하는지를 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아요. 그걸 인지하고 나니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욕심과 '훌륭한 배우가 되고 싶다'는 바람이 거듭되면서 결과에만 집착하게 되더라고요. 그때가 참 힘들었던 거 같아요. 연기가 무섭고 두려웠어요. 주어진 일을 못 한다는 생각이 드니까 즐길 수가 없더라고요. 저도 그 시기를 돌아보면 힘들어요. 선배님들께서 '이 시기에 부딪히고 지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한 작품 한 작품 할 수만 있다면 언젠가 이 시기도 지나갈 거고 엄청난 경험이 될 거다'라고 조언해 주셨는데 그 말만 믿고 버텼어요. 지금 돌아보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좋은 감독님, 작가님, 연기자 선배님들을 만났고 기대 이상으로 잘 보냈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1997년 생인 여진구는 이제 입대를 앞두고 있다. 여러모로 마음이 어지러운 시기일 것 같았지만 대화를 나눌수록 여진구가 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는 인상이 들었다.
"걱정이 왜 없었겠어요. 20살이 되고 나서는 내내 불안하고 걱정됐죠. 연기도 잘 안 풀리고 뭐든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군대도) 다녀와야 한다니. 실질적으로 연기 외에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 연기도 못 하게 되니까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되었던 거예요. 지금은 30대가 기대돼요. 최근 여러 작품을 통해 선배님들과 만나며 불과 몇 년 전 저와는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편안한 상태가 됐어요. 지금은 (군대) 다녀와서 제 모습이 기대됩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여진구는 '용대' 역을 통해 연기 스펙트럼 확장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이번 작품으로 받고 싶은 평가는 '여진구가 이런 작품도 관심이 있구나' '저런 역할도 잘하는구나' 하는 반응이에요. '하이재킹'이 제게 다양한 역할을 제안해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영화를 통한 저의 고백과도 같아요. 어떤 작품이나 역할이든 열려 있다는 각오죠. 연기한 지 20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다양한 역할을 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