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성어로 세상 읽기] (18) 흙먼지 일으키며 다시 돌아오다 - 권토중래(捲土重來)

2024-06-17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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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혁 에세이스트
[유재혁 에세이스트]



1990년대에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광고 카피가 등장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바꿔 말하면 1등만 기억되는 세상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세상일이 어디 늘 그렇기만 하던가. 살다보면 승자보다 패자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한다. 승패가 극적으로 뒤바뀌면 더욱 그렇다. '아름다운 패배'라는 형용모순적 표현도 패자를 위로하는 동시에 패자를 응원하던 자신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 고안된 말이 아닐까 싶다. 비단 스포츠뿐만 아니라 역사의 무대에서도 대중의 시선은 종종 승자보다 패자에 쏠린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나라가 망한 후 천하 패권을 다툰 항우와 유방의 경우도 그러하다. 패권 전쟁 이름부터 승자 유방이 세운 한나라가 아니라 패자 항우의 나라를 앞세워 '초한전쟁(楚漢戰爭)', 또는 '초한전(楚漢戰)'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 이야기를 다룬 수십 종의 소설도 제목은 조금씩 다를지라도 대개 '초한지(楚漢志)'로 대중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초한전을 모티브로 해서 만들어졌다는 장기판을 보더라도 항우는 결코 패자가 아니라 유방의 영원한 맞상대다. 항우의 영웅적 서사는 금의환향, 파부침주, 사면초가, 역발산기개세 등 여러 성어에서도 그 흔적이 남아 후세인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그를 회상하게 한다. 이번 회차에서 다룰 '권토중래' 역시 그 유래가 항우의 비장한 최후에서 비롯되었다. 

4년간 계속된 전쟁에도 패권의 향방이 가려지지 않자 항우와 유방은 휴전 협약을 맺는다. 홍구(鴻溝)를 경계로 땅을 동서로 나눈 후 군대를 이끌고 고향땅으로 돌아가던 항우는 휴전 협약을 깨고 급습한 유방 군대에 패퇴를 거듭한다. 위용을 자랑하던 초나라 십만 대군은 사면초가에 휩쓸려 죽거나 산산이 흩어졌다. 고향에서부터 자신을 따르며 동고동락하던 강동 자제 8천 정예병도 모두 잃었다. 
해하(垓下)에서 마지막 전투를 치르고 오강(烏江, 장강의 지류로 안휘성에 있음)에 이르니 남은 병력은 고작 기병 28기.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 훗날을 도모하라는 사공의 권유를 물리치고 항우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때 그의 나이 고작 30세. 일세를 풍미한 영웅은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천 년의 세월이 흘러 당나라 말기, 시성 두보와 함께 이두(二杜)로 불리는 두목(杜牧)이 오강가에 와 항우를 회고하며 시 한 수를 남겼다.

勝敗兵家事不期 包羞忍恥是男兒 
江東子弟多才俊 捲土重來未可知

승패란 병가에서 기약할 수 없는 일
수치를 끌어안고 참는 것이 사나이라네. 
강동의 젊은이 중에는 준재가 많으니
흙먼지 일으키며 다시 왔다면 결과는 알 수 없었으리라.

두목은 항우가 패전의 좌절을 딛고 오강을 건너가 훗날을 도모하였다면 다시 한번 떨쳐 일어날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한 번 싸움에 패한 사람이 다시 힘을 길러 땅을 휘몰아치듯 흙먼지 일으키며 쳐들어 오는 것, 어떤 일에 실패하였으나 힘을 축적하여 다시 그 일에 착수하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 '권토중래(捲土重來)'가 이 시 《제오강정(題烏江亭)》에서 유래하였다. 송나라 때 살았던 중국 최고의 여류문인 이청조는 시 《하일절구(夏日絕句)》를 짓고 이렇게 영웅을 기렸다. "지금도 항우를 그리워함은 강동으로 건너가지 않았기 때문이라네(至今思項羽 不肯過江東)." 

얼마 전 경제뉴스 한 토막이 이 유서 깊은 고사성어를 떠올리게 했다. 삼양라면을 만드는 삼양식품이 업계 부동의 1위 농심을 제치고 시가총액 1위에 올랐다는 뉴스다. 2012년 시장에 내놓은 '불닭볶음면'의 세계적인 신드롬에 힘입어 매출이 급신장했고 주가 역시 고공행진을 거듭한 덕이다. 요즘 삼양식품의 주가는 농심을 크게 웃돈다. 주식 수에 주가를 곱한 시가총액(時價總額)은 기업의 가치를 평가하는 지표이다. 시가총액이 1위가 곧 업계 1위를 뜻하진 않는다. 하지만 시가총액이 크다는 것은 실적뿐 아니라 미래의 성장에 대한 기대도 크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삼양식품이 시가총액 1위에 오른 함의가 결코 가볍지 않다. 

삼양식품은 라면의 원조이자 명실상부한 마켓리더였다. 전중윤 창업주가 1963년 일본으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아 국내 최초로 라면을 출시했다. 쌀이 부족해 국가적으로 분식을 장려하던 시절, 라면은 밥을 대신해 배를 채울 수 있는 대용식으로 안성맞춤이었다. 간편하고 맛도 좋아 시장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조미료 하면 '미원'이었듯 라면 하면 '삼양'으로 통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롯데에서 갈라져 나온 후발주자 농심의 적극적인 신제품 개발과 마케팅에 밀려 1980년대 중반 이후 업계 1위 자리가 흔들렸고, 1989년 불거진 공업용 우지(牛脂, 쇠기름) 파동은 '삼양라면=불량 식용유' 라는 인식을 대중의 뇌리에 각인시켜 삼양라면의 추락을 가속화했다. 8년을 끈 법정 공방 끝에 무죄를 입증받았지만 한번 떠난 소비자의 마음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고, 농심은 물론 오뚜기에도 뒤진 3위로 주저앉아 기나긴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최근 영국의 한 매체는 한국 라면을 영웅에 비유하며 이렇게 소개했다. "라면은 대학생부터 직장인까지 사회적 격차를 뛰어넘어 한국 문화의 필수품이 됐고, 오늘날 이 위대한 사회 통합 음식은 전 세계를 제패했다.” 라면은 이제 값싼 대용식이 아니라 세계인이 즐기는 훌륭한 먹거리다. 라면 수출액은 4년 새 갑절로 늘어나 올해 10억 달러를 돌파할 전망이다. K라면 약진의 선두에 '불닭볶음면'이 있다.

한때 부도 위기에까지 몰렸던 삼양식품이 전세계적으로 매운 맛 바람을 일으키며 화끈하게 돌아왔다. 삼양식품의 시가총액 1위 등극은 패망 직전의 항우가 오강을 건너 전열을 재정비하고 힘을 기른 후 다시 돌아와 전략적 요충지를 탈환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총성 없는 전쟁터에서 말 그대로 권토중래의 시동을 건 것이다. 바야흐로 '라면업계 초한전쟁' 파트2의 서막이 올랐다. 삼양식품의 실지 회복이 계속될까, 농심이 반격에 성공할까? 이래저래 라면 먹는 즐거움이 더해질 것 같다.


* 중국에서는 초한전을 '한초상쟁(漢楚相爭)'이라고도 하며, 소설 초한지의 원본은 명나라 때 나온 '서한연의(西漢演義)'이다.





유재혁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제일기획 근무(1985~2008) △'한국산문' 등단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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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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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물들의 각인효과처럼 첫라면의 기억이 새롭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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