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혜숙 칼럼] '리사 수'의 성공신화 뒤엔 선진적인 조직문화 있었다

2024-06-20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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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인재는 저절로 성장하지 않는다

임혜숙 교수
[임혜숙 전자전기공학전공 교수]
 
지난 5월에 진행된 이화여대 창립 138주년 기념식에서 근속 20주년 표창장을 받았다. 30대 후반의 나이에 조교수로 부임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 같은데, 공직에 나가 있었던 1년 5개월을 포함하면 어느새 22년의 세월을 이화여대에서 일한 것이다. 처음 교수가 된 후 10년이 넘는 동안은 우수한 연구 결과를 내고 좋은 논문을 쓰겠다는 일념으로 임했다. 그때는 연구와 강의 외의 다른 모든 일들은 연구 시간을 빼앗는 부수적인 일로 생각했다. 이화여대 졸업생이 아닌 매우 소수의 여성 교수 중 한 사람이었지만, 출신학교에 따라 배제하지 않는 포용적인 이화여대 조직문화 덕분에 교내 주요 보직을 맡게 되었을 때도 연구에 지장 받을 것을 가장 염려했다.
 
새로운 시각으로 보직 업무를 바라보게 된 것은 2012년에 교무처 부처장으로 일하면서부터다. 연구에 쏟을 시간이 부족해진 데 대한 아쉬움은 여전했지만, 보직자의 역할이 훨씬 더 영향력이 있는 일이라 생각하기 시작했다. 교수님들이 질적으로 우수한 연구 결과를 낼 수 있도록 교수 평가제도를 개선하고 불합리한 제도를 정비한 일에 자부심을 느꼈다. 교무 부처장의 임기가 끝날 즈음에는 조직의 책임자로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공학인재양성 사업단장에 이어 2018년 마침내 공과대학 학장으로 일할 기회를 얻었다. 막중한 책임에 대한 부담감이 컸지만, 조직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해동과학문화재단 지원으로 공대 도서관을 현대적으로 바꾸고 학생들의 학습공간을 새롭게 만들었다. 교수님들께 좀 더 많은 우수한 대학원생 연구인력을 확보해 주고자 대학원생 예비선발전형 및 대학원 신입생 첫 학기 장학금 제도를 만들었고, 공대 우수 교수 시상 제도 등을 시행했다. 공대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각자의 목표를 이루고 성장하도록 돕는 일에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 학교 본부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공대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본 경험은 더 큰 책임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과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게 했다.
 
기업분석 연구소 리더스인덱스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2023년 기준 국내 30대 그룹의 295개 계열사 임원 가운데 여성 비중은 전체 임원의 7.5%인 847명으로, 전년도 778명(6.9%)보다 69명 증가했다. 여성 사내이사는 전체 777명 중 25명(3.2%)으로 전년보다 단 1명 증가했고, 미등기 여성 임원의 경우 전체 9702명 중 650명(6.7%)으로 전년보다 49명 증가하였다. 여성 사외이사 수는 지난해 153명(18.5%)에서 172명(20.4%)으로 19명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 사외이사의 수가 증가한 것은 2020년에 국회에서 통과된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자본시장법)’ 개정에 따른 효과로 보인다. 개정된 내용은 자산총액 2조원 이상인 주권상장법인의 경우 이사회의 이사 전원을 특정 성(性)으로 구성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별도의 제재 조항이 없어, 여성 임원이 한 명도 없는 회사의 수는 지난해 98곳(33.2%)보다 11곳 줄어든 87곳으로, 여전히 전체의 30%나 차지하고 있다.
 
노르웨이에서는 1990년대 초반부터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및 기업 이사 확대를 위해 기업의 자발적 노력을 독려하였으나 그 효과를 거의 볼 수 없었다고 한다. 2003년 여성이사할당법(상장기업 이사회에 여성을 최소 40%로 채워야 하고, 기준 미달 시 상장 폐지)을 제정하였고, 제정 당시 8.6%에 머물던 여성 이사 비율이 2022년에는 45%로 증가하였다. 유럽연합 또한 회원국들 기업 내 여성 이사 비율을 30~40%까지 맞추길 요구하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상장회사의 여성 이사를 법제화했고, 이스라엘·인도·캐나다 퀘벡주 등에서도 여성임원할당제가 법으로 정해져 있다. 이러한 사례는 조직 구성의 다양성은 법과 제도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함을 말해준다.
 
그러나 다양성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다양성이 조직의 성과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포용적 조직문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사실은 야망을 가진 당신에게 (이은형, 유재경 공저)>에서는 포용적 조직문화가 없는 곳에서 다양성만 추구하는 경우 오히려 갈등이 증폭되고 배제 현상이 나타날 수 있음을 경고한다. 다수그룹과 소수그룹 간 직급 차이가 크지 않고, 팀원들이 자신의 의견을 격의 없이 토론하며 의견이 반영된다고 느낄 수 있는 조직문화, 다름에 대해 인정하고 서로 배우는 포용적인 문화가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할 때 더 나은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고, 구성원들이 느끼는 만족도나 공평함 등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어 업무의 질이 향상된다는 것이다.
 
다양성과 포용성의 추구가 높은 성과로 이어진 기업의 사례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P&G의 경우 공정한 업무평가 시스템을 구축하고 평가과정에서 ‘성별’이나 ‘인종’ 등의 업무와 관계없는 요소에 영향받을 여지를 줄였다. 특히 P&G는 육아휴직 복귀율 100%를 자랑하는데 출산, 육아 등 삶의 중요한 단계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직원들의 경력 단절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마이크로소프트(MS)는 조직문화 혁신이 성과로 이어진 대표적인 기업이다. 쇠락해가던 MS를 2014년부터 이끌게 된 사티아 나델라는 회사의 중요한 전략을 임원진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 직원들이 직접 참여하는 해커톤을 통하여 만들도록 했다. 이를 통해 수평적인 문화가 활성화되고 기존 조직문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다양성과 포용성이 조직에 스며들 수 있었다. 10년 만에 세계 시가총액 1위로 올라선 MS의 사례는 기업의 성공을 크게 좌우하는 것이 ‘조직문화’라는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
 
여성 인재 활용을 위해 노력하는 대표적인 기업으로는 IBM이 꼽힌다. IBM에서는 일찍부터 여성들이 직면하는 가장 높은 장벽이 ‘핵심직책(Key Position)’으로의 승진이라는 점을 간파하고 임원인사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데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여 여성 임원 비율이 매우 높은 회사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여성 직원들을 임원과 연결해 일대일로 조언받도록 하는 멘토링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IBM의 선진적인 조직문화 속에서 리더로 성장한 여성이 바로 리사 수(Lisa Su)이다. 리사 수는 MIT에서 전자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12년간 IBM에서 일하면서 그녀의 평생의 멘토 니콜라스 도노프리오를 만났다. 도노프리오는 엔지니어 경력만 쌓고 있던 리사 수를 IBM 최고경영자의 기술 자문으로 추천하는 등 경영자로서의 경력을 쌓을 수 있게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AMD 이사회에 합류한 후에는 리사 수를 AMD로 영입하였다. 리사 수는 2014년부터 AMD의 CEO로 재직하면서 파산 직전까지 갔던 AMD를 부활시켜 CPU 경쟁에서는 인텔에, GPU 경쟁에서는 엔비디아에 대적하는 회사로 자리매김하게 하였다. 실리콘 밸리 반도체 기업 최초의 여성 CEO인 리사 수는 2020년 타임지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선정되었을 뿐 아니라 2021년에는 99%가 넘는 압도적인 지지율로 CEO 연임에 성공하였다.
 
여성 인재는 저절로 성장하지 않는다. 다양성과 포용성을 장착한 조직문화가 그들을 리더로 키워내는 것이다. 만약 내가 구성원 절대다수가 남성으로 이루어진 남녀공학 공과대학의 교수가 되어 소수 여성으로 지난 22년을 살아왔다면 지금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본다. 대학을 다닐 때 학과 내 여학생 단둘 중 하나였던 내 모습을 돌아보면 상상이 그리 어렵지 않다. 소수 여성으로서 느끼는 소외감과 위축감은 자신감의 결여와 저성과로 이어졌을 것이고, 보직을 통해 리더의 역할을 경험할 기회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74년 만에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대한전자공학회 회장을 역임한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첫 여성 장관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필자 주요 이력 

△이화여대 전자전기공학전공 교수 △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 전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이사장 △ 제50대 대한전자공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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