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슈퍼 선택의 해’라 불릴 만하다. 연초에 대만의 대선과 총선을 필두로 한국의 총선과 러시아의 대선이 치러졌고, 다음 달에는 유럽의회 선거와 인도 총선이 기다린다. 지구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련의 정치적 이벤트들이 펼쳐지는 가운데 11월 미 대선이 대미를 장식할 전망이다. 그 와중에 당장 다음 달 6일부터 9일까지 치러지는 유럽의회 선거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극우 정당의 약진 여부에 따라 기존 유럽연합의 녹색·무역·이민 정책 및 대외관계에 심대한 변화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도 이미 이에 대한 대비에 들어갔다. 지난 2월 산업통상자원부는 ‘유럽연합 경제‧정치 전문가 간담회'를 열어 유럽연합 내 정치지형 변화에 따른 향후 경제정책 전망과 우리나라에 미칠 영향에 대해 논의했다. 경제안보와 녹색산업정책을 강조하는 정책기조가 지속되리라고 전망하면서 지정학적 불안정성과 물류, 공급망, 에너지 가격 등 현안 타개를 위한 유럽연합과의 협력 강화 및 제도와 규제의 탄력적인 적용이 논의되었다.
극우 정당들의 경제정책은 ‘반(反) 기후 정책행동’으로 집약된다. 그들은 넷제로(Net-Zero)와 탄소세 등 기성정당의 에너지 전환정책을 폐기하겠다고 공언함으로써 실제로 에너지 전환정책으로 고통을 겪는 계층의 표를 흡수한다. 최근 몇 년간 전 유럽에서 빈발한 농민 봉기가 이를 입증한다.
2주 앞으로 다가온 202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에너지 전환보다 더욱 첨예한 쟁점은 이민정책이다. 그 뒤를 이어 러시아와 중국 문제, 환경·기후 보호, 경제나 경쟁력과 관련된 국제 갈등과 위협 문제들이 거론된다. 5월 초 설문조사에서 유럽연합의 이민정책에 대한 만족도는 유권자의 31%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현재 유럽연합은 유럽으로 오는 난민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최근 ‘신(新)이민·난민 협정’을 가결했다. 이에 따라 난민 신청자를 제3국으로 인도하는 조치가 가능해졌고, 유럽연합은 제3국과 협정을 체결하고 재정 지원을 제공할 수 있게 됐다. 터키, 이집트, 튀니지 및 레바논은 유럽연합과 또 다른 난민 협정을 체결했다. 유럽으로 이주를 어렵게 하는 이러한 조치와 협정이 유럽 내 유권자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극우 정당의 반(反) 난민 정책의 확산을 입증해 준다.
그렇다면 실제로 유럽의회 선거에서 극우세력은 어느 정도로 약진할까? 그들이 유럽의회 내 중요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을까? 여러 나라의 여론조사를 종합하면 극우세력의 약진은 분명해 보인다. 물론 5년 전 선거에서 극우 포퓰리즘 정당들은 20석 확대에 그쳐 약진 예상에 미치지 못한 전례가 있음을 상기할 필요는 있다.
근래 프랑스에서 28살의 젊은 국민연합 당수 바르델라가 이끄는 극우정당 국민연합(RN)의 인기는 대단해 보인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국민연합의 지지율은 31.5%를 기록해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중도 성향 르네상스당 지지율 17%보다 거의 두 배 앞섰다. 프랑스 우파 의원의 분석에 따르면 유럽의회 위원회의 의장 또는 부의장직이 극우 계열로 넘어갈 수 있다고 한다. 나아가 극우 계열의 ‘정체성과 민주주의’(ID)와 ‘유럽 보수와 개혁’(ECR)이 연합해 유럽연합의 우크라이나 지원 정책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가디언은 ID가 현재 59석에서 85석으로 늘어 제3그룹으로 도약하는 한편, 중도 계열의 ‘리뉴유럽’(RE)은 현재 102석에서 80석으로 대폭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다. 또한, 로이터는 ECR이 30~50석을 늘려 극우그룹의 전체 의석 비중이 현재 18%에서 22~25%로 커질 것으로 예측했다. ECR에는 폴란드의 ‘법과 정의’(PiS),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의 ‘이탈리아 형제단’, 스페인 Vox 등이 속해 있다.
독일에서 발행되는 빌트 일요판(Bild am Sonntag)을 위한 여론조사기관 Insa의 최신 조사 결과(성인 1000명의 온라인 설문 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유럽의회 내 최대 정파인 ‘유럽국민당’(EPP)을 주도하는 기민련이 30%의 지지율을 차지하기에 극우 정당에게 주도권을 내어 줄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러나 중도좌파 사회민주당은 현 집권당임에도 불구하고 14%에 그쳐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연정파트너인 녹색당도 13%를 기록하며 정체상태를 벗지 못하고 있다.
기존 정당들의 지지율 부침에 비해서 독일의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지지율은 최근 17%로 안정세를 보이는 중이다. 여기서 말하는 안정세에 대해서는 약간의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연초부터 AfD에는 악재가 연달아 터졌다. 지난 1월 매체 ‘Correctiv’의 폭로로 AfD 의원들이 오스트리아 극우파 정치인 등과 함께 수백만 명의 외국인을 독일에서 추방하는 계획을 모의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독일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그리고 최근에는 AfD의 당수 막시밀리안 크라가 중국 스파이 혐의로 조사를 받는 가운데 이탈리아 언론매체와 인터뷰하면서 “나치 친위대(Schutzstaffel, SS)의 제복을 입었다고 해서 모두가 자동으로 전범자였다고 말하지 않겠다”고 발언해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로 인해 프랑스 국민연합과 이탈리아 ‘동맹’(Liga)은 AfD와 결별을 선언했고, ‘정체성과 민주주의’(ID)는 AfD 소속 유럽의회 의원 9명을 제명하기로 결정했다. 이런 악재 속에서도 지난 조사와 동일한 지지율이 나왔다는 점이 매우 시사적이다.
나아가 독일 사회는 정치인을 향한 테러로 매우 뒤숭숭한 상황이다. 5월 8일, 사민당 소속 프란치스카 기파이 베를린 경제장관이 베를린 노이쾰른의 한 도서관에서 일정을 수행하던 중 괴한이 휘두른 둔기에 머리를 맞았다. 범인은 정신질환 이력이 있는 74세 남성으로 알려졌다. 그보다 앞선 5월 3일, 사민당 소속 마티아스 에케 유럽의회 의원이 동부 작센주 드레스덴에서 유럽의회 선거 포스터를 붙이던 중 10대 청소년 4명에게 집단 폭행을 당했다.
두 사례는 집권 사회민주당 정치인을 향한 독일 동부 주민들의 증오를 보여준다. 그런데 노인과 청소년이 가해자라는 사실은 세대를 가리지 않고 불만이 광범위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더욱 놀랍게도 2023년 한 해에만 선출직 공무원을 향한 범죄가 독일에서 2710건 발생해 전년 대비 53% 늘었다고 독일 내무부가 발표했다. 독일 정부는 이를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대처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공표했지만, 정치적 성향 차이를 적극적인 반감과 테러로 표출하는 행태를 과연 어떻게 얼마나 잠재울지 의문이다.
유럽에서 극우세력 확산은 어제오늘의 얘기는 아니다. 자유와 관용의 나라로 여겨지던 네덜란드나 스웨덴에서도 극우세력의 약진이 우려스러울 정도다. 그런 점에서 현재 유럽정치는 1930년대 유럽을 연상시킨다. 대공황의 여파 속에 군림하던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스페인의 프랑코 파시즘 체제가 2008년 경제위기와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의 여파 속에 득세하는 극우세력들한테서 재현되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실제로 독일언론은 이탈리아 총리 조르자 멜로니를 파시스트 계승자(Postpfascistin)라고 지칭한다. 멜로니가 건재한 상황에서 프랑스의 국민연합 후보나 독일의 AfD 후보가 대통령이나 총리가 되는 순간 유럽의 정치 주도권은 완전히 극우세력에게 넘어갈 게 자명하다. 독일 정치인 테러 급증과 지난 5월 15일 일어난 슬로바키아 총리 암살 기도 같은 사건들이 유럽 민주주의 소멸의 전조 증세로 보이는 건 필자의 과민반응이길 바란다.
안상준 필자 이력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 취득 △(전) 한국중세사학회 회장 △컬럼비아대 해리먼 연구소 방문교수 △교수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