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되풀이되는 재난과 참사에 대한 정부의 지원책이 발표됨에도 피해자들은 외로운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다. 진상 규명과 피해 책임 보상 외에 이들이 필요로 하는 건 피해자와 피해 유가족의 권리를 보장받는 일이다.
이를 위해 인권위는 8일 오후 국회의원회관 제2소회의실에서 피해 유가족 등과 함께 재난·참사 피해자 권리보호를 위한 정책 토론회를 열었다.
그간 국가 재난 안전 정책은 재난·참사 피해자를 도움이 필요한 대상으로 규정하고 이들에 대한 피해 지원을 ‘시혜적’ 관점으로 바라본다는 한계가 있어 왔다. 피해자 중심이 아닌 공급자 중심의 지원에 초점을 맞춰 운영됐다는 지적이다.
2014년 세월호와 2022년 이태원 참사, 지난해 오송 지하차도 참사가 발생한 이후, 재난·참사 생존자와 유가족에 대한 정부의 미흡한 지원이 되풀이되고 2차, 3차 가해가 발생하면서 피해자 권리 보호에 대한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인권위와 피해 유가족 등은 여전히 국가 재난 대응에 피해자의 권리가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이들은 새로 수립될 정부의 안전관리기본계획이 ‘인권’에 기반한 재난피해자의 권리 보호를 목표로 해야 한다고 뜻을 모았다.
여전히 ‘시혜에 기반한 접근’…반복되는 아픔
토론회에 참석한 참사 피해 유가족들은 현장에서 겪은 생생한 사례를 공유했다.
오송 지하차도 참사 유가족은 이날 “유가족의 필요를 먼저 파악하고 맞게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방침을 정해 통보했다가 유가족들의 반응을 보고 뒤늦게 내용을 수정하거나 추가하는 식”이었다고 현장에서 있었던 피해 지원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일례로 청주시청은 오송 지하차도 참사 유족들의 심리 치료를 지원하는 내용을 담은 ‘호우피해 관련 재난심리치료비 지원 안내문’을 발송했다. 안내문에는 “호우 피해와 관련된 정신건강 문제로 정신의료기관을 이용하면 최대 1년까지 1인당 100만원 이내로 의료비를 지원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이에 유가족들은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치료에 금액과 기한 제한을 두는 것이 맞지 않는다고 충북도에 항의했다. 언론과 시민단체 등도 문제를 지적하자 충북도는 치료 금액과 기간에 제한을 두지 않겠다고 수정했다.
재난피해자와 유가족에 대한 혐오표현 등으로 인권이 침해되는 문제도 지적됐다. 유가족들은 “혐오와 2차 가해 속에 참사를 제대로 추모할 권리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강조했다.
참사 생존자였던 A군은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A군의 어머니는 “어떻게든 살아보려던 아이의 치료·회복에 정치인들의 막말과 온라인 혐오 표현이 찬물을 끼얹었다”며 “희생자가 마약을 투약했다는 등 거짓사실이 난무하는 것에 아이는 억울함을 표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인권 가이드라인’ 권고 무색…전문가 부족 등 현장 한계 뚜렷
재난·참사 피해자 권리 보호를 위해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해 3월 중앙행정기관과 지방자치단체에 재난피해자의 인권에 기반한 안전관리계획을 수립할 것을 권고했다.
인권위가 권고한 가이드라인은 국가 재난 안전 관련 정책과 계획의 수립에 필요한 인권적 기준, 피해자의 권리,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의 의무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인권위 권고가 있었던 같은해 11월 국무총리·행정안전부·17개 광역지자체는 인권위 권고 취지에 공감해 관련 절차에 따라 인권 친화적인 안전관리계획을 마련할 예정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인권 가이드라인을 반영할 만큼의 공무원 인력도, 전문성도 부족하다는 현실적인 지적이 나온다.
김유택 충청북도 안전정책과 안전정책팀장은 이날 토론회에서 “제5차 안전관리 기본계획이 진행되는 걸로 알고 있지만 계획이 아무리 잘 돼 있더라도 현장에서 어떻게 실행이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김 팀장은 “광역 지자체 아래 기초 지자체의 재난 안전 담당 공무원들은 한 팀당 4~5명으로 구성된다”며 “밑으로, 현장으로 가면 갈수록 업무량은 가중되는 구조인데 전문성 있게 업무를 추진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인력 부족에 따른 업무 피로도가 높은 상황에서 현장 공무원들이 피해자의 권리 보호를 위해 힘쓰기엔 한계가 있다는 취지다.
이어 김 팀장은 전문성 있는 재난 담당 공무원이 없다고 꼬집었다. 그는 “재난 담당 공무원들의 전문성이 저하됐다”며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방재안전직 직렬도 만들었지만 (전문) 자격증 없이 시험을 쳐서 들어올 수 있는 직렬이다 보니 현장에서 더 전문성이 있다고 볼 수 없는 상황이다”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