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인정하는 데에는 크게 법률적(de jure) 인정과 사실적(de facto) 인정이 있다. 남북한 사이에는 어떨까? 분단 이후 지금까지 남한은 북한을 단 한번도 법률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대한민국의 헌법을 보면 알 수 있다. 헌법 제3조에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되어 있으니 북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분단된 영토를 통일해야 할 시대적 사명을 안고 왔다. 헌법 제4조가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라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통일을 위해서는 법률적으로는 인정하지 않지만, 실질적으로는 북한의 존재를 인정하는 일이 필요하다. 평화적 통일의 수단이 대화와 교류·협력에 있는 바, 이는 북한을 인정해야만 가능하다. 이런 까닭으로 남한은 그동안 많은 법률적 조치를 취해왔다. 남북교류협력법(1990)과 남북관계발전법(2005)을 비롯하여 협력사업의 구체적 추진을 위한 개성공업지구지원법(2007) 등의 제정이 그것이다.
남북 사이에 체결한 남북기본합의서(1991)를 보면 남북한이 서로 법률적으로는 국가로 인정하지 않지만, 사실적으로는 승인하고 있음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다시 말해 남북 쌍방의 관계는 비록 “나라와 나라의 관계”는 아니나 사실상 그 존재를 인정하는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것이다. 이를 쌍방이 ‘인정하고’ 있음을 못 박고 있으며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해 공동의 노력을 경주할 것에도 의지를 함께했다(남북기본합의서 전문). 이런 점에서 남북한은 ‘1민족 2국가’의 관계라고 할 것이다. 서로 외국이면서도 외국이 아닌 관계로 봐 왔다. 법률상 국가로는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평화통일’을 위해 실질적으로는 서로를 인정해 온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그와 같은 실질적인 인정을 깡그리 무시하는 양상을 띠고 있다. 다시 말해 남북한 모두 그 어떤 형태의 인정도 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강하게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그 접근 방법에 있어 남북한이 큰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 데 있다. 북한은 제도적으로 대남관계를 근본적으로 수정하고 있는 대신, 남한은 북한을 단순히 부정하는 것으로만 대하고 있는 점이다. 북한이 견지하고 있는 대남관계의 근본적 전환은 남한이 더는 “동족관계, 동질관계가 아니다”라는 선언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남한을 “가장 위해로운 제1의 적대 국가, 불변의 주적”으로 거론(24.2.8 김정은의 국방성 연설)하면서 “전쟁의 가능성”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다. 동시에 남한과 추진했던 대화나 협력의 “비현실적인 질곡”을 털어버리고 “언제든 치고 괴멸시킬 수 있는 합법성”을 가지게 되었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심지어 유사시 남한의 영토를 침공하는 것을 “국시”로까지 정해놓고 있을 정도다. 더 나아가 “통일, 화해, 동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완전히 제거”(2024.1 최고인민회의)하는 한편, ‘민족화해협의회’나 ‘민족경제협력국’ 등 그동안 남한을 상대한 자신들의 흔적마저 지우고 있다. 남한을 “대한민국”으로 호칭한 것도 남한을 정식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더는 동족의 개념으로 보지 않겠다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남한은 어떤가? 윤석열 정부는 남북관계를 규율해 온 기존의 법과는 관계없이 북한에 대한 적대적 감정만을 앞세우고 있을 뿐이다. 취임 초부터 미국과의 동맹을 최우선시하는 방식으로 북한의 존재를 지워왔다. 미국의 핵전략에 적극적으로 부응, “김정은 정권의 종말”(2022.10. 핵태세재검토, NPR)을 공공연히 거론하고 있는가 하면, 지난해 한미정상회담에서 채택한 ‘워싱턴선언’(2023.4.26.)을 통해서는 ‘핵에는 핵으로의 대응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북한이 ‘군사정찰위성’을 발사하자 남북한 사이의 우발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9⸱19 군사합의’의 효력을 정지(23.11.22)시켜 버렸다. 그러면서 대북한 "즉·강·끝"만을 외치고 있다. 북한이 도발하면 “즉시 강력히 끝까지 응징”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작금의 대북한 적대적 관계 설정은 우리의 독자적 정책이 아닌 미국의 대북정책에 의존하고 있는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윤 정부는 앞으로도 과연 지금까지 유지해 온 대북정책을 견지해 나갈 수 있을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금년 11월에 있을 미국의 대선에서 ‘트럼프’가 재선된다면 어떻게 될까? 대북한 적대적 정책을 계속 고수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트럼프의 돌출행동이 기존의 미·북 관계를 바꿀 가능성이 상당하다. 트럼프는 5년 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의 결렬을 교훈 삼아 색다른 결단을 할 가능성이 크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 중단을 조건으로 대북 경제제재 완화를 보장하는 협상은 물론, 미국의 북핵 용인도 거론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미국과 국제사회가 이스라엘과 인도, 파키스탄을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용인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럴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북·미관계의 개선에 따라 미국 기업의 대북 대규모 진출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트럼프의 대선 승리로 미국의 대북 정책이 변할 경우, 북한의 비핵화를 목표로 강력한 대북 압박 정책을 고수해 온 한국 정부는 어떤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될까? 북·미 대화와 협상은 우선 '통미봉남'(通美封南)의 재현으로 나타날 것이 분명하다. 북한은 남한을 의식해서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더 적극적으로 임할지도 모른다. 미국의 대북한 관계 개선에 따라 남북관계도 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면, 남한은 과연 어떻게 대북한 관계를 설정할 것인가? 갑자기 북한을 사실상 인정하는 관계로 바꿀 수 있겠는가? 이를 위해서는 제3국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와 관련 동서독 사례가 큰 시사점을 제공한다. 브란트 정부 출범 이후 서독은 기존의 대동독 압박 정책에서 벗어나 동독과의 관계 개선은 물론, 다양한 협력을 담은 "동서독 기본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동독은 서독과는 민족이 다르다는 문제를 앞세워 기본조약의 체결을 강하게 거부했다. 그때 서독은 소련을 찾았다. 소련이 동독에 압력을 가하게 함으로써 동서독 외교 관계의 수립과 유엔 동시 가입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동독은 1972년 12월 동베를린에서 서독과 기본조약을 체결했다. 한국은 어떤가? 러시아로 하여금 북한을 설득할 수 있는 북방외교라도 하고 있는가 말이다. 더 늦기 전에 준비해야 한다. 대북방 외교와 함께 북한을 사실상 인정하는 정책을 마련해 추진해야 할 것이다.
김영윤 필자 주요 이력
▷독일 브레멘대학 세계경제연구소 연구원 ▷통일연구원 북한경제연구센터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