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국내 최초의 직업합창단인 국립합창단을 만들어 전국 시립합창단 창단을 이끈 '한국 합창의 대부' 나영수 한양대 성악과 명예교수가 2일 오후 2시 56분께 분당제생병원에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전했다. 향년 만 85세.
1938년 3월 12일 만주에서 태어나 함북에서 자란 고인은 1949년 겨울 가족과 함께 월남, 대구 경북중·경북고에서 성악을 배웠다. 서울대 성악과 재학 중 KBS 합창단 창단 멤버로 활동하기도 했다.
1962년 국내 최초의 뮤지컬 극단인 예그린 합창단원으로 들어갔다가 1963∼1964년 1년간 서울민속가무단에서 합창단 지휘자의 길로 들어섰다. KBS 합창단을 잠깐 지휘한 적도 있다.
1970∼1972년 MBC TV 초대 합창단장을 거쳐 1972년 예그린악단이 국립극장 산하 국립가무단으로 변신하자 1973년 5월 국립가무단 합창단 지휘를 맡게 됐다. 이것이 1974년 7월 창단 공연을 거쳐 1975년 1월에 정식 창단하는 국립합창단의 시작이었다.
1974년 창단 공연 시 판소리 '심청가' 중 '뱃노래'의 편곡을 작곡가 김희조(1920∼2001)씨에게 맡겨 민요 합창곡으로 만들고 '대학생 합창곡 발표회'를 10년간 개최하는 등 한국어 합창곡 600여곡을 개발했다.
'몽금포타령', '새야 새야 파랑새야', '세노야' 등도 고인의 의뢰로 합창곡으로 거듭났다. 국내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복음성가 중 한곡인 '이 믿음 더욱 굳세라' 등도 고인의 손을 거쳤다.
국립합창단을 이끌고 지방 연주를 하며 전국에 시립합창단 수십 곳이 생겨나게 한 구심 역할을 했다. 1976년 한국합창총연합회 설립을 주도했고, 3대 회장을 지내며 한국합창제를 개최했다. 1982∼2003년 한양대 성악과 교수로 강단에 섰다.
국립합창단은 초대에 이어 3대, 7대 단장을 역임하는 등 21년간 이끌었다. 그 사이에 성남·서울·울산시립합창단을 지도했고, 2004∼2006년 울산대 석좌교수로 활동했다. 2013년 이후에는 지방시립합창단 객원 지휘를 하며 지냈다.
고인은 음악공로상(1992), 한국합창대상(1995), 한국뮤지컬대상(1995), 백남학술상(1999), '예술문화대상'(2002), 백남상(2017)을 받았다.
유족은 부인 김미정씨와 사이에 1남1녀로 나윤선(재즈 가수)·나승렬(사진작가)씨와 사위 인재진(자라섬 재즈페스티벌 총감독)씨, 며느리 민선주(작가)씨 등이 있다. 빈소는 분당서울대병원 장례식장 3호실, 발인 5일 오전 7시, 장지 용인서울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