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균 칼럼] 대한민국 산업정책의 새 출발을 위하여

2024-02-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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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균 명지대 경영정보학과 명예교수
[김호균 명지대 경영정보학과 명예교수]



“제가 여러분의 손을 굳게 잡겠습니다.” 지난 2월 16일 카이스트 학위수여식장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축사를 낭독했다. 중간박수가 끝나자마자 “R&D 예산을 복원하라”고 외친 졸업생은 졸업생들로 위장하고 있던 경호원 6, 7명에 의해 입이 틀어 막힌 채 식장 밖으로 들려 나갔다. 이튿날에는 윤 대통령의 “사죄”와 함께 예산복구를 요구하는 졸업생들의 동조 시위가 일어났다. 연구개발은 대표적인 ‘시장실패’ 영역이기 때문에 정부 주도 산업정책의 근간을 이룬다.
산업정책은 인구소멸 대책이다. 지난 1월 울산시가 97개월 만에 단 1명의 인구증가를 경험하면서 내놓은 인구소멸 해답은 “적극적인 투자 유치와 신산업을 육성해 양질의 일자리가 늘어나면 인구 증가로 이어질 것”이며 “교육, 문화, 복지, 의료, 교통, 환경 등 생활 여건도 인구증가에 맞춰 개선”하는 것이다. 저출산문제에서 윤 대통령은 한국 사회의 ‘과열경쟁’을 원인으로 지적한 바 있다. 한국 사회에서 과열경쟁은 SKY에 입학하기 위한 입시경쟁이고 이 입시경쟁은 다시 좋은 일자리를 둘러싼 경쟁이다. 과열경쟁을 완화하는 길은 대학입시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것이다. 대학 서열화가 엄존하는 한 대학입시 폐지는 불가능하다. 대학 서열화는 결국 좋은 직업을 가질 졸업생을 배출하는 결과를 반영한다. 이제 21세기 들어 대학가에는 대학의 서열화뿐만 아니라 학과 서열화가 의대 중심으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경제적 이익이 큰 곳으로 사람과 기업은 모여들기 마련이다. 고부가가치산업의 육성이 인구소멸 대책이 되는 이유이다.

산업정책은 동시에 대외경제정책이다. 한국 기업의 해외 상품판매는 지원하되 해외투자는 국내로 전환을 유도하거나 기술유출은 제한하는 것이 국익이다. 폴란드에서 생산될 K9자주포는 폴란드의 군사안보와 경제성장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폴란드에서 일자리도 창출하고 세금도 납부할 것이다. 한국에서 생산하든 폴란드에서 생산하든 한화에게는 비슷한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겠지만 한국 경제에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중장기적으로는 폴란드 경쟁기업을 키워 이 기업이 유럽시장을 장악하게 될 수도 있다. 기업이 당장의 성과에 집착할 때 정부는 속도를 조절하면서 먼 미래를 내다보아야 한다. 한국 대통령과 정부가 앞장서야 할 것은 해외 첨단기업의 한국 투자를 유치하는 길이다.

산업정책은 경제안보정책이다. 한국 정부가 코로나19 국면을 벗어나면서 급부상하는 경제안보에 대한 관심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무차별적인 최저가원칙의 중대한 수정이 필요하다. 여기에 미·중 갈등의 심화는 미국 패권의 유지와 미국 제조업 강화에 기여할 ‘프렌드 쇼어링’을 새로운 현상으로 부상시켰다. 이 또한 한국 정부가 수출주도 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견지해온 최저비용, 최저가 원칙을 수정해야 함을 뜻한다. 당장은 중국과 일본의 ‘경제보복’에 대비해서도 공급망 내재화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특히 드론, 모빌리티, 태양광 등 전략산업을 경제안보 논리에 입각해서 육성해야 한다.

산업정책은 일자리정책이다. 산업정책이 국민의 복리후생 증대에 기여하려면 일자리를 창출하는 정책이어야 한다. 한국의 인구감소 현상은 일자리와 워라밸의 전망이 개선될 것이라는 기대를 접는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정부는 청년 일자리를 창출하기보다 노인인구를 저임금노동력으로 ‘재활용’하는 추세를 굳히고 있다. 로봇과 인공지능이 대체할 일자리 종류와 수는 지금으로서는 정확하게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한국은행 연구에 따르면 앞으로 20년 동안 국내 일자리의 12%, 341만개의 일자리가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것으로 예상된다. 노동시간 단축과 기본소득 도입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지겠지만 그래도 노동사회는 오래 갈 것이고 새로운 일자리 창출은 중요한 과제로 남을 것이다.

한국 경제에서 정부의 능동적인 일자리 창출 정책이 절실하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는 비정규직 도입, 외국인 노동자 유입을 늘려왔으며 이제는 노인층을 저임금부문으로 흡수하고 있다. 저임금·장시간을 거부하는 청년층은 ‘은둔·고립’마저 불사하고 있다. 정부가 지난 1월 마련한 ‘청년층 노동시장 유입 촉진방안’은 우선 명칭부터 전형적인 ‘책임 떠넘기기’이다. 청년에게는 자격증보다 일자리가 부족하다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있다. 공기업 적자 해소방안으로 자회사 매각을 서두르기보다 항공우주산업이나 방위산업에서 성공한 공기업 사례들을 일자리창출 대책으로서 ‘복제’할 필요가 있다. 공기업이 관피아를 위한 재취업 일자리가 아니라 청년 일자리를 만든다면 그것만으로도 긍정적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산업정책은 노동정책이다. 중국 경제의 부상으로 한국은 경쟁산업에서 고임금국이 되었다. 이 국면에서 조선산업이 중요한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중국과의 경쟁에서 ‘고부가가치선박’을 수주하는 것은 고숙련노동 덕분이다. 2022년부터 호황으로 수주가 밀려들자 2016년 해고한 노동자들의 ‘복귀’를 호소했지만 호응이 거의 없다. 거제시장까지 나서 임금인상의 필요성을 주장했지만 정부와 조선소는 외국인 노동자 유치를 선택했다. 외국인 노동자는 이민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체류기간이 짧을 뿐만 아니라 원활한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하여 숙련이 승계될 수 없다. 조선공업을 ‘사양산업’으로 낙인이라도 찍듯이 조선 3사는 상선용 블록을 중국에 위탁생산하기 시작했다. 외국인 노동자 유입과 중국 하청은 조선산업의 활로가 아니라 퇴로가 될 가능성이 크다. 영국법원에서 진행 중인 LNG운반선 화물창 관련 소송을 정부가 나서서 조속히 해결하고 화물창 국산화 기술인 KC-2의 보급을 서두르는 것이 합리적이다. 척당 100억원의 로열티를 절감하면 임금인상의 여지가 넓어질 수 있을 것이다.

산업정책은 에너지정책이다. 한국의 산업구조와 산업정책을 ‘탄소중립 2050’에 맞추는 것이 ‘글로벌 스탠더드’이다. 원전을 둘러싸고는 냉정한 현실과 부풀려진 희망 사이에서 착각과 혼동이 일고 있다. 원천기술을 주장하는 웨스팅하우스는 독자기술을 주장하는 한국의 해외시장 진출을 가로막고 있다. 미국은 한국을 시공능력을 갖춘 하위 파트너이자 향후 원전수출시장으로 바라보고 있다. 작년 7월 한·미정상회담 공동성명에 규정된 “지식재산권의 존중” 해석을 둘러싸고도 국내에서는 논란이 일고 있지만 섣부른 낙관이나 비관은 금물이다.

원전산업 활성화에 가장 큰 걸림돌은 원자력이 탄소제로 에너지이기는 하지만 재생에너지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원자력을 이용해서 생산한 반도체는 RE100에 참여하는 글로벌 기업에는 판로가 막힌다는 약점을 안고 있다. RE100은 민간기업 차원의 캠페인이기 때문에 정부간 협약의 구속력이 미치지 않는다. 반도체산업의 증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수출 주도로 성장하는 한국은 원전보다 재생에너지를 미국이나 중국보다 더 빠르게 확장해야 한다.

산업정책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인공지능(AI)과 로봇으로 대표되는 생산 패러다임의 전환, 경제안보의 부상에 따른 공급망 내재화, 탄소중립 2050의 도전, 인구소멸은 한국 경제 전반에 걸친 새판짜기를 요구하고 있다. 타성에 젖은 정부의 산업정책이 이러한 요구에 충분히 부응할 수 있을지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국익과 국민의 복리후생 증진을 중심에 두고 생명을 존중하는 정책이어야 한다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김호균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독일 브레멘대 경제학 박사 ▷명지대 경영정보학과 교수 ▷경실련 경제정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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