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와 법조계에서는 그동안의 법원 판단과 달리 매우 전향적인 판결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지배구조 개편 과정이 회사와 주주의 이익으로 이어졌으며, 삼성그룹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처음 계획하는 단계부터 주주 이익을 고려했다는 것이 무죄 판결의 이유 중 하나다. 또 이사회를 통한 투명한 의사결정 절차도 이재용 회장이 위법 행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근거가 됐다.
본지는 판결문을 중심으로 이재용 회장의 무죄 이유와 재판부가 바라본 삼성의 지배구조 개편을 분석하고, 과거 배임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은 국내 총수들의 판결과 비교한다. 또 현재 삼성그룹과 비슷한 방법으로 경영승계를 진행 중인 국내 대기업의 승계구조를 짚어본다.
<글 싣는 순서>
1. 이사회·주주 중심 경영이 끌어낸 '무죄'
2. 삼성 승계작업, 다른 기업과 차이점은
3. 대기업 M&A 승계...법조계 우려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자본시장과금융투자업에관한법률위반(이하 자본시장법) 등 혐의’ 재판을 맡은 재판부가 삼성물산-제일모직의 합병 등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 작업이 주주 이익이 크다는 등의 이유로 전부 무죄를 판결했다. 이에 따라 재계에서는 '사법리스크'가 없는 승계방식에 대한 법원의 가이드라인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재판부는 이 회장의 지배력 강화 목적 그 자체도 총수의 사익이 아닌 주주 공동의 이익으로 판단하는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그 판단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 자본잠식 위기 삼성물산, 합병 후 기사회생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2부(부장판사 박정제 지귀연 박정길)가 지난 5일 선고한 이 회장 외 피고인 13인의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 1심 판결문에 따르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은 크게 5가지 측면에서 주주 이익으로 이어졌다.
△바이오사업 성과 △재무구조 개선 △순환고리 해소 △신용등급 상향 △삼성물산 3조원대 부실로 인한 자본잠식 우려 해소 등이다.
재판부는 먼저 삼성물산이 삼성바이오로직스를 지배하고 있는 제일모직과 합병하면서 영업실적에서 큰 개선을 이뤘다고 설명했다.
합병 이후 바이오사업은 꾸준히 성장했으며, 2020년 들어서는 바이오부문의 영업이익 비중이 전체의 28.8%에 달할 정도로 회사의 주력 사업으로 성장했다는 부분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는 시장 예상치인 13.7%보다 두 배 이상 높은 수치다.
특히 판결문에는 합병 후 로직스가 안정적으로 성장해 본격적인 이익을 내기 시작한 2019년부터는 폭발적인 영업이익 성장을 이뤘다는 부분이 강조됐다. 2020년 2470억원이었던 로직스의 영업이익은 2022년 9468억원까지 증가하면서 삼성물산 전체 영업이익 중 40%를 차지했다.
순환고리 해소 측면에서는 2014년 5월 10개에 달했던 삼성카드와 삼성생명을 중심으로 한 순환출자 고리가 2015년 5월 두 회사의 합병 이후 7개로 줄어들었으며, 이후에도 일부 계열사 매각을 통해 그룹이 투명해지고 단수화됐다는 부분이 언급됐다.
무엇보다 재판부는 마이너스 성장으로 자본잠식 위기였던 국내 건설사들과 삼성물산의 합병 후 행보가 정반대인 점을 들어 주주 이익이 실현됐다고 판단했다. 합병 전 삼성물산의 신용등급은 AA-로 평가됐다. 하지만 합병 후 우수한 재무안정성, 사업다각화로 인한 경기대응력 제고 등을 이유로 신용등급은 AA+로 상향됐다. 이 기간 포스코건설, GS건설, SK건설, 한화건설, 두산건설, 삼성엔지니어링 등 국내 주요 건설사들은 신용등급이 강등됐다. 유가하락으로 인해 건설·상사 부문 주력사업이 크게 위축됐기 때문이다.
삼성물산은 또 2015년 4분기부터 2016년 1분기까지 약 3조원의 손실이 회계에 반영되면서 자본잠식에 빠질 위기였으나 제일모직과 합병으로 인한 ‘빅배스’ 효과로 인해 재무건전성을 지킬 수 있었다.
같은 이유로 재판부는 삼성그룹이 합병 전 이 회장의 지분이 많은 제일모직의 합병비율을 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삼성물산의 주가를 하락시켰다는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경영악화로 주가가 50% 이상 하락한 건설사들이 속출했기 때문이다.
◆ "이재용 지배력 강화 자체도 주주이익"...삼성 측 숨기지 않았다
판결문에 따르면 이 같은 합병 후 동반성장 효과는 삼성그룹이 두 회사의 합병을 처음 검토할 당시부터 언급돼 왔으며, 주요 투자자들과 주주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회사 합병에 따른 동반성장 효과 외에 이 회장의 지배력 강화 자체도 긍정적인 공감대를 형성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를 두고 재판부는 “자신이 투자한 회사에 대한 대주주의 지배력 강화로 경영권이 안정되는 것은 (주주의) 손해가 될 수 없다”고 명시했다.
재판부는 삼성물산이 그룹에 대한 지배력이 낮아 경영권이 불안정한 회사라고 봤다. 이에 따라 제일모직과의 합병을 통한 그룹 지배력 강화는 경영권이 안정화로 이어지고, 삼성그룹 지배구조 최상단에 위치하는 사실상의 지주회사가 돼 물산과 그 주주들에게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합병에 반대했던 행동주의 투자 펀드인 엘리엇조차도 “삼성그룹의 지배권 승계를 위한 구조개편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지지한다”고 밝혔으며, 함께 반대의견을 냈던 네덜란드 연기금도 “물산과 모직 간 합병 취지에는 찬성”한다는 의견을 낸 바 있다.
또 법원은 삼성이 2015년 주총을 앞두고 주주들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이 회장의 지배력 강화 목적을 가장 먼저 언급하며 은닉하지 않은 부분을 강조했다. 삼성그룹의 입장에서는 이 회장의 지배력 강화 자체가 주주의 이익이라고 판단한 만큼 ‘강점을 보다 잘 알리자'는 일을 했을 뿐이라 게 법원의 판단이다.
◆ 이사회 중심의 경영결정...미전실 영향 크지 않다
삼성그룹의 이사회 중심의 경영도 이 회장 무죄 판결의 이유가 됐다. 재판부는 삼성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한 미래전략실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으로 인한 이 회장의 지배력 강화에만 집중했을 뿐, 그룹의 주요 의사결정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미전실이 작성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검토 문건인 ’프로젝트-G’보다 1년 반 앞선 2013년 1월 작성된 ‘에버랜드 상장 및 합병 검토’ 문건에서 이미 “주주 입장에서 향후 성장동력 강화 기대감을 긍정적 평가 예상”이라는 문구가 있었으며, 이후 회사 사정을 잘 아는 각사 소속 경영진과 이사회에 의해 지배구조 개편 작업이 최종 결정됐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주요 목적에 이 회장의 지배력 강화가 포함됐으나 전반적으로 두 회사의 합병 효과로 인한 주주 이익이 검토된 측면이 크며, 이 회장의 지배력 강화 자체도 경영권 안정화로 인해 주주 이익으로 이어진다고 봤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결국 총수만을 위한 지배구조 개편인가 주주의 이익을 고려한 작업인가가 유·무죄를 가른 것 같다”며 “투명한 경영결정과 주주이익을 우선시한 지배구조 개편이라면 그 목적이 승계라 할지라도 무죄의 여지가 있다는 판결로 해석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