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성어로 세상 읽기] (9) 가을 매미처럼 아무 소리를 내지 못하다 - 금약한선(噤若寒蟬)

2024-02-13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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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혁 에세이스트
[유재혁 에세이스트]



어릴 적 방학 때면 매번 아버지가 시골 외가에 보내 한동안 지내다 오게 했다. 도시에서 자란 아이의 시골생활은 여러모로 낯설고 불편했지만 외사촌 형제들과 산과 들을 뛰노는 재미가 이를 상쇄하고도 남아 별다른 불만을 갖지는 않았던 것 같다. 
시골에서 보낸 여름은 매미 우는 소리로 기억된다. 키가 크고 잎이 우거진 나무에서 들려오는 매미 울음소리는 요란했다. 지금도 매미들이 맹렬하게 울어대는 소리가 귓전에서 맴도는 듯하다. 언제부터인가 여름이면 도시에서도 매미 우는 소리로 잠을 설친다. 도심의 온도가 높아지는 열섬 현상이 원인이란다. 비록 잠을 설치게 할지언정 매미는 울어야 매미답다. 매미의 정체성이 울음에 있기 때문이다. 

한여름 내내 고막을 때리던 매미소리는 어느 순간 홀연히 사라진다. 가을이 온 것이다. 메뚜기가 여름 한철을 보낸 후 비실비실하듯 매미 또한 조금만 한기를 느껴도 몸을 부르르 떨며 울지 못한다. 울지 않는 가을 매미를 한선(寒蟬)이라고 한다. 마치 한선처럼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금약한선(噤若寒蟬)이란 성어가 생겼다. 

동한(東漢, AD25~220) 말기에 두밀(杜密)이라고 하는 명신이 있었다. '동한 팔준(東漢八俊)'의 한 명인 그를 사람들은 "천하명신 두주부(天下良輔杜周甫)"라 칭송했다. '당고의 옥'*으로 파직된 두밀은 낙향 후에도 국가대사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인재를 발굴하여 천거하고 악행을 저지르는 관리는 상소를 올려 처벌받게 하는 등 나라와 백성에 이롭다고 여기는 일을 해나갔다. 당시 유승(劉勝)이라고 하는 두밀의 동향 사람이 있었다. 쓰촨 지방의 태수를 역임한 그는 낙향 후 두밀과 정반대로 명철보신(明哲保身)으로 일관했다. 문객을 사절하고 정사에 관심을 끊었으며 마을사람들의 품행이 어떠하든 강 건너 불 보듯 했다.

어느날 두밀이 고을 태수 왕욱(王昱)과 정사를 논하던 중 유승 이야기가 나왔다. 정사를 입에 담지 않는 고결한 선비(清高之士)라며 왕욱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유승을 칭찬했다. 이에 두밀이 말하기를, "유승은 고위 관리로서 나라의 신임과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으면 응당 나라와 백성을 위해 공헌을 해야 하거늘 나랏일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니 이는 울지 않는 가을 매미와 다를 바 없다. 오직 자신의 명철보신과 무사안일만을 도모하고 나라와 백성들에 대해 아무런 책임감이 없는 이런 사람은 사실상 죄인인데 칭찬할 게 무엇이 있겠는가(劉勝位為大夫, 見禮上賓, 而知善不荐, 聞惡無言, 自同寒蟬, 此罪人也)"라고 했다. 왕욱이 자신의 짧은 생각을 부끄러워 하면서 이후 두밀을 한층 더 높이 평가하고 신뢰했다.(《후한서•두밀전後漢書•杜密傳》) 

김건희 여사 명품백 수수 의혹과 관련  나라가 시끌시끌하다. 급기야 마리 앙투와네트가 소환되고 대통령실과 여당 비대위가 치고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외국 유수의 언론에서도 기사로 다룰 만큼 글로벌 가십거리가 됐다. 그럼에도 대통령실은 그저 폭풍우가 잦아들기만을 바라며 침묵으로 일관했다. 세간의 의구심이 눈덩이처럼 커지는데도 영부인 이름 석 자가 금기어라도 되는 듯 권부의 어느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국민 앞에 나서서 진솔하게 자초지종을 밝혀야 할 대통령마저 한사코 언급을 피했다. 침묵이 언제나 금이 되는 건 아닌데 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을 사전 녹화된 KBS 특별대담으로 갈음했다. 100분 동안 진행된 대담에서 대통령은 저출산, 민생, 외교안보 정책을 비롯하여 대북관계 및 핵 개발, 심지어 개 식용 문제까지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지만 인구에 회자되는 것은 6분 가량 언급하고 지나간 명품백 관련 대목뿐이다. 대통령으로서는 야박하다고 하겠지만 세상 이치가 그렇고 정치가 또한 그렇다. 오죽하면 나 같은 필부도 명품백 논란을 글쓰기 재료로 삼겠는가.

논란이 불거진 지 70여 일 만에 나온 대통령의 첫 입장 표명에 사과를 했느니 안 했느니 뒷말이 무성하다. '사과'라는 단어만 쓰지 않았을 뿐 사과를 한 거라는 주장에도 일리가 없지는 않지만, 사과인 듯 아닌 듯 어정쩡한 사과, 언 발에 오줌 누기식 해명이 이른바 '영부인 리스크'를 진정시킬 수 있을까? 설 연휴 밥상머리 민심이 과연 누구의 손을 들어주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결국 명품백 논란이 정권의 큰 부담이 됐다. 설명하면 그만이었을 일이 해명으로도 부족하게 됐다. 호미로 막을 일 가래로도 못 막는다는 옛말 그대로다. 누구의 책임일까? 두밀은 퇴직한 관리라도 나라를 위해 입을 다물면 안된다고 했다. 입을 열어야 할 때 닫는 것은 나라에 큰 죄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했다. 하물며 현직에게 있어서랴. 대통령의 '격노'가 가을 한기 정도가 아니라 북풍한설에 버금갈지언정 진작에 입을 열어야 했다. 명품백 수수와 국정 개입성 발언으로 들끓는 민심을 가감없이 전하고 정면 대응을 통한 조기 진화를 건의했어야 마땅했다. 그랬더라면 설을 앞두고 대통령이 카메라 앞에서 구차한 변명을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봉건사회에서 제왕을 모시던 신하들은 목숨을 걸고 직언을 했다. 민주사회에서 대통령을 보필하는 참모들은 직이라도 걸고 할 말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임명권자의 눈치를 보며 가을 매미처럼 입 꾹 다물고 있던 대통령실 참모들이 대거 총선 출사표를 던졌다. 본분을 다하지 못한 인사들이 염치불구 금뱃지를 탐하는 모양새가 볼썽사납다. 민주당은 공천권을 쥔 당 대표를 둘러싸고 친명, 비명에 이어 친명, 친문으로 쪼개져 집안싸움으로 날을 지샌다. 공천을 받기 위해서라면 악을 보고도 입을 다물(見惡無言) 위인들만 눈에 띈다. 최선이 아니라 차악의 후보를 뽑아야 하는 고충이 크다. 언필칭 유권자의 신성한 권리라는 투표가 갈수록 하기 싫은 숙제가 되고 있다. 


*당고(黨錮)의 옥(獄): 동한 말기 환관을 탄핵하던 관료들을 당인(黨人)으로 몰아 평생 벼슬길에 나오지 못하도록 금고(禁錮, 관리가 되는 자격을 박탈)에 처한 사건. '당고의 화(黨錮之禍)'라고도 한다. 두 차례 일어난 당고의 옥으로 민심이 크게 동요했고 동한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유재혁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제일기획 근무(1985~2008) △'한국산문' 등단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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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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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말 실감나고 공감갑니다. 학폭에서도 침묵의 방관자도 공범으로 간주하지요.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이중언어 국가에 사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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