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386세대라고 부르는 지금의 50대와 60대들은 아마도 약칭 ‘보카(VOCA) 22000’이라는 영어책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아카데미 토플’이라는 책도 기억할는지 모르겠다. ‘보카 22000’이라는 책은 온라인 서점을 검색해 보니 요즘에도 팔린다. 아마 당시 대학생들은 영어 공부를 한다 치면 열에 아홉은 토플(TOEFL) 책과 약칭 ‘보카 책’을 공부했을 것이다. 이 ‘Vocabulary 22000’이라는 책은 영어 단어의 유래와 어근을 다루는데, 단어의 어원이 고대 그리스어인지 라틴어인지, 아니면 순수 게르만어인지, 하여튼 어원을 공부함으로써 단어를 쉽게 이해하고 암기하기 위한 책이었다. 가령 ‘scope’는 그리스어 ‘skopein(보다)’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tele’ 역시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접두어로 ‘멀리 떨어진’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telescope’는 멀리 보는 것이라 망원경이다. 또 ‘tele’에다 ‘소리’라는 ‘phone’을 붙이면 ‘telephone’, 멀리 가는 소리라서 ‘전화기’가 되고, ‘graph’는 ‘글자’이니 ‘telegraph’는 ‘멀리 가는 글자’라서 ‘전보’가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는 말이 나온다.
동아시아는 한자문화권이다. 한자문화권은 말 그대로 한자를 중심으로 한 문화권임과 동시에 유교문화권과 일치한다. 사람들은 한국, 중국, 일본을 일컬어 한자문화권이라고 하지만 여기에 베트남이 추가된다. 흔히 사람들은 베트남이 동남아시아에 위치해서 동남아시아권으로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언어와 문화, 그리고 문자를 사용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베트남은 한국과 같이 분명 한자문화권이면서 유교문화권에 속하는 국가이다.
한국어는 알타이어족에 속한다. 베트남어는 오스트로아시아어족에 속한다. 그리고 한국어는 교착어인 반면 베트남어는 고립어에 속한다. 서로 어족은 달리하지만 그 어휘 구성에 있어서 한국어나 베트남어는 한자 어휘와 단어들이 60~70%를 차지한다. 그래서 지구상에서 한국인들이 배우기에 쉬운 언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한국어는 장단의 언어이기도 하지만, 과거 한국어는 훈민정음에 성조를 나타내는 점들이 있어 성조어였음을 알 수 있고 오늘날 그 흔적은 경상도에 남아 있다. 한국어가 장단의 언어이지만 아마 성조의 특성도 있지 않을까 한다. 필자의 수업에서 경상도 출신 학생들과 경상도를 제외한 서울·경기·강원·충청·전라 지역 학생들에게 2e 내지 e2를 발음하라고 하면 이 둘의 발음을 달리 구별해서 성조를 실어서 발음하는 학생은 경상도 출신 학생들이다. 그래서 경상도 사람들은 베트남어를 배우는 데 성조의 어려움은 비교적 적다고 할 수 있다. 좌우지간, 그리스·로마에 바탕을 둔 어휘, 단어, 그리고 문화를 영어, 독일어 등 게르만어 계열과 스페인, 프랑스 등 로망스어 계열의 언어들이 공유하듯이,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한국어와 베트남어도 어휘, 단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부분이 많다. 그래서 한국인이 베트남어를 학습하거나 베트남인이 한국어를 학습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수 있다. 베트남어를 공부하는 데에는 한자를 암기할 필요가 없다. 베트남어에는 과거 한국이 이두를 사용한 것처럼 ‘쯔놈’이라는 문자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17세기 프랑스 선교사 알렉상드르 드 로드(Alexandre de Rhodes)가 로마자에 기반해서 문자 표기법을 정립하였다. 마치 한국의 세종대왕 같은 존재이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베트남 정부가 개혁·개방을 위한 도이머이(Đổi Mới) 정책을 추진하여 경제 전반을 자본주의 기반 정책으로 고쳐나가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에 한국은 특히 경제, 무역, 투자 분야에서 베트남의 1위 외국직접투자국, 2위 공적개발원조(ODA) 후원국, 3대 무역국이다. 요즘 홈쇼핑에는 다양한 의류 제품 광고가 나온다. 제품이 좋아 보여 유심히 보면 베트남 제조라는 문구가 어김없이 보인다. 삼성전자는 베트남을 주요 제조 중심지로 집중 육성하였고, 베트남 수출에서 20%를 차지하는 베트남의 국민기업이 된 지 오래이다. 그리고 한국 내에도 사드 이후 중국인 유학생들이 물러난 그 자리를 베트남인 유학생들이 채우고 있다.
필자 주요 이력
△부산대 번역학박사 △미국 University of Dayton School of Law 졸업 △대구가톨릭대학교 영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