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내년 경제정책에서 '성장'에 방점을 찍었다. 최근 부동산 위기, 실업난,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하락) 등과 같은 문제에 맞닥뜨린 중국 경제를 살리는 데 주력하겠다는 것이다.
지난 11~12일 이틀간 열린 중국 중앙경제공작회의에서 중국 정부의 경제 회생 의지는 다시 한 번 확인됐다. 중앙경제공작회의는 중국 지도부가 한자리에 모여 올 한해 경제 업무를 돌아보고 내년 거시경제정책의 큰 방향을 설정하는 비공개 회의다. 이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은 내년 3월에 열리는 양회(전국인민대표대회,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 상정돼 논의를 거쳐 내년 정부 업무보고에 담긴다. 몇 가지 키워드로 올해 중앙경제공작회의 내용을 짚어본다.
온중구진·이진촉온···'성장'에 방점
온중구진(穩中求進), 이진촉온(以進促穩)은 중국 지도부가 내년 경제 기조로 내세운 키워드다. ‘안정 속 성장을 추구하되, 성장으로 안정을 촉진하라’는 뜻으로, ‘안정을 최우선으로(穩字當頭), 안정 속 성장을 추구하라(穩中求進)'는 지난해 회의 문구보다 성장을 한층 더 강조한 것이다.
이를 위해 적극적 재정정책과 온건한 통화정책을 강조했다. 특히 회의는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적절히 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는데, 왕칭 중국 둥팡진청 수석 애널리스트는 13일 상하이증권보에 “이는 올해 중국 재정적자율과 지방특별채 발행 규모가 어느 정도 상향조정될 것임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그는 중국 정부가 내년에 인프라 투자를 늘려 부동산 경기 침체로 직격탄을 입은 지방정부 재정 위기를 어느 정도 해소하는 데 주력할 것으로 진단했다.
아울러 통화정책 방면에서는 "사회 자금 조달 규모와 통화 공급량이 경제 성장과 가격 수준 기대 목표에 부합해야 한다"는 문구가 새로 추가됐다. 이는 지난해 회의에서 통화 공급량이 명목성장률에 부합해야 한다고 언급한 것과 다른 점이다.
중국이 내년 온건한 통화 정책 기조를 내세우면서도 통화정책의 융통성·정확성·효율성을 강조한 만큼, 내년 디플레이션 문제가 심화되면 통화 완화 기조로 전환될 가능성을 시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짚었다.
래리 후 맥쿼리 중국경제 책임자는 블룸버그에 "통화정책이 디플레이션 리스크에 직면해 더 완화 기조로 전환될 수 있다"며 "향후 1년간 기준금리와 은행 지급준비율을 더 많이 인하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진단했다. 중국은 올해 기준금리와 지준율을 각각 20bp(1bp=0.01%포인트)와 50bp씩 인하했다.
선립후파···장기과제는 점진적 해결
선립후파(先立後破), 먼저 세우고 나중에 돌파한다는 뜻이다. 올해 처음 중앙경제공작회의에 내년 경제기조로 등장한 문구다. 이는 중국 지도부가 가뜩이나 코로나19로 경제가 어려운 시기에 부동산 규제, 저탄소, 빅테크(인터넷기업) 플랫폼 단속, 사교육 규제 등 각종 정책을 한꺼번에 쏟아내 무리하게 밀어붙이다가 결국 경제 하방 압력이 커진 과거의 사례에서 교훈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중국 정부가 현재로선 어려운 상황에 놓인 경제를 살리는 데 초점을 맞추고, 지방부채나 부동산 리스크 등과 같은 장기적 과제는 당장 무리하게 추진하기보다는 우선순위를 정해 점진적으로 해결해 나갈 것이란 의미로 읽힌다.
실제로 올해 회의는 경기 회복세를 지원하기 위해 재정·통화·고용·산업·지역·과학기술·환경보호 등 여러 방면에서 경제·비(非)경제성 정책 간 조율을 한층 강화해 나가겠다고 했다.
회의에서는 내년 경제 분야의 중점 과제를 아홉 가지 언급했는데, 이 중 중소은행·부동산·지방부채 등과 같은 중점 분야의 리스크 해소는 기술혁신, 내수진작, 중점 개혁 심화, 대외 개방 확대에 이어 다섯째로 언급되기도 했다. 사실상 우선순위에서 밀린 셈이다.
특히 부동산 문제와 관련해 회의는 규제보다는 부동산 경기를 살리는 데 우선 순위를 뒀다. 회의는 부동산 기업의 합리적 자금 수요를 충족시키고 보장성 주택 건설·도시 재개발·공공인프라 구축 등을 가속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내수진작보다 앞세운 기술혁신
대신 중국은 올해 회의에서 내년 경제 분야의 중점 과제 첫번째로 기술 혁신을 통한 산업 발전을 언급했다. 내수 확대도 기술 혁신에 밀려 두 번째로 언급됐을 정도다. 회의는 "과학기술 혁신으로 현대화 산업 체계를 구축한다. 획기적, 최첨단 기술로 새로운 성장동력과 생산력을 발전시킬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언급한 것이 디지털경제와 인공지능(AI) 산업의 발전이다. 뒤를 이어 바이오제조, 상업용 항공우주, 양자, 생명공학 등 신산업을 발전시킴과 동시에 디지털 친환경 기술로 전통산업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이는 최근 미국과 중국 간 기술 패권 경쟁 속 미국이 중국의 첨단 반도체 등 기술 제재를 강화하는 가운데 중국이 자국 경제 성장을 위해 기술 자립을 얼마나 중요시 여기는 지를 보여준다는 해석이 나온다.
영국 경제 금융 연구소 판테온 매크로이코노믹스의 던컨 웰던 중국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중국 정책당국자들은 신기술 개발, 전통산업 업그레이드, 신흥산업 육성이 성장과 생산성을 높이는 열쇠라고 굳게 믿고 있다”며 "이 전략은 지정학적 위험을 수반한다"고도 지적했다. 블룸버그는 "소비 중심의 경기 부양에 중점을 두기를 바라는 투자자들이 실망할 가능성이 높다"고 언급했다.
내년에도 5% 성장률 사수할 듯
내년 중국 경제 정책에서 ‘성장’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중국 지도부가 내년 성장률 목표치도 올해와 동일한 5% 남짓으로 잡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4.6%, UBS 4.4%, 골드만삭스 4.8% 등 최근 각종 기관에서 내년 중국 성장률 전망치를 4%대로 예상하지만 이보다 높게 잡을 것이란 얘기다. 앞서 무디스는 최근 중국 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내리고 내년 성장률도 4%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한 바 있다.
원빈 중국 민생은행 수석 경제학자는 상하이증권보를 통해 "(내년 경제 기조로 언급한) 이진촉원은 곧 성장을 통해 안정 문제를 해결한다는 뜻"이라며 "내년 성장률 목표를 5% 남짓으로 잡고 더 적극적인 정책으로 기업 자신감을 진작시킬 것"으로 내다봤다. 모건스탠리도 중국이 성장률 목표치를 4.5% 이상 '낙관적'으로 설정하는 것이 자신감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앞서 로이터는 소식통을 인용해 중국 정부 자문들이 내년 경제 성장률 목표를 4.5~5.5% 범위로 설정할 것을 권고했고, 대다수 사람들이 올해와 마찬가지로 5% 안팎으로 설정하는 데 동의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중앙경제공작회의에서 설정된 성장률 목표치는 내년 3월 양회 때 정부 업무보고에서 공개된다.